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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제6과-(전력을 다해 싸움) - (핵심 Q & A -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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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8-02 01:58 조회1,2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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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과 전력(戰力)을 다해 싸움

                                      (08월06일 (안) / 일몰: 19시 36분)

<서언(緖言)>

 왜 우리는 고난(苦難)이나 환란(患亂)을 당할 때 포기(抛棄)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야 하는가? 

이는 고해(苦海)와 같은 세속(世俗)에서 성령(聖靈)께서는 죄(罪)를 보여주실 수는 있지만 죄인들로 하여금 억지로 회개(悔改)하도록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能力)에 힘입어 죄와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意志)하여 확실(確實)한 선택(選擇)과 인내(忍耐)로 시련(試鍊)과 연단(鍊鍛)을 극복(克服)할 때 성숙(成熟)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수가 있다.


(07월31일 (일) <진리(眞理)의 영(靈)>


(Q)~(요 16:5~15) 진리(眞理)의 영(靈), 성령(聖靈)께서 우리를 위(爲)해 하시는 일과, 하실 수 없는 일을 설명(說明)해 보세요?


(A)~○. 진리의 영(靈)이신 성령께서는 죄(罪)를 깨닫게 해주시지만 회개(悔改)시킬 수는 없고, 진리(眞理)를 가르쳐 주실 수는 있지만 믿고 순종(順從)하도록 강요(强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속사업(救贖事業)에는 강제(强制)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人間)에게 주신 최고(最高)의 선물인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존중(尊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眞理)의 영(靈)이신 성령(聖靈)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변화(變化)시키실 수 있도록 의식적(意識的)으로 회개(悔改)와 순종(順從)의 문(門)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08월01일 (월) <하나님과 인간(人間)의 협력(協力)>


(Q)~(골로새서 1:28~29)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인간(人間)의 노력(努力)의 관계(關係)를 어떻게 설명(說明)하고 있습니까?


(A)~○. 인간(人間)의 노력(努力)은 하나님의 능력(能力)이 없이는 아무런 필요(必要)가 없다. 그리스도의 품성개발(稟性開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에 힘입어 우리의 최선(最善)의 노력(努力)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전적(全的)으로 믿는 자(者)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한 것이다.

사도(使徒) 바울은 (골1:29)에서 간증(干證)하기를 내 속에서 능력(能力)으로 역사(役事)하시는 이 즉(卽) 자신(自身)의 사도직(使徒職)의 능력(能力)의 원천(源泉)이 자기 밖에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있다. 즉 바울은 구주(救主)의 능력(能力)이 자신의 삶 속에서 강(强)하게 역사(役事)했기 때문에 증거(證據)할 수 있었다. (골 1:28~29, 만나주석) 


(08월02일 (화) <훈련(訓練)된 의지(意志)>


(Q)~(창 3:6, 삼하 11:3,4) 순간적(瞬間的)인 감정(感情)에 휘둘려 잘못된 선택(選擇)을 했던 예(例)를 성경(聖經)에서 찾아보십시오.


(A)~⑴.(창세기 3:6)의 하와의 교훈(敎訓)은 선악과(善惡果)가 원래(原來) 이러했다기 보다는 하와가 경계심(警戒心)을 늦추고 탐욕(貪慾)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먹음직도 하고 …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렇게 행동(行動)으로 옮겼다. 

    ⑵.(삼하 11:3,4) 다윗의 교훈(敎訓)은 유혹(誘惑)이 일어났을 때 다윗은 그것을 제재(制裁)하지 않고 그의 마음의 생각(生覺)을 행동(行動)으로 옮기려는 결심(決心)을 하고 지붕에서 내려왔다. 죄(罪)를 제안(提案)한 유혹자(誘惑者) 앞에 다윗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막 8:33)는 말로 물리쳐야 했는데, 그 대신 유혹자(誘惑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音聲) 대신 사단의 음성(音聲)에 복종(服從)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感情)의 지배(支配)를 받는 대신 훈련(訓練)된 의지(意志)를 활용(活用)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基礎)한 바른 선택(選擇)을 통(通)해 정로(正路)를 따라가야 한다. 


(08월03일 (수) <단호(斷乎)한 선택(選擇)> 


(Q)~마태복음 5:29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의 참된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


(A)~○.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분명(分明)하고도 단호(斷乎)히 확실(確實)한 실천(實踐)을 요구(要求)하시는데 이러한 때는 우리가 감당(堪當)하기 힘들고 고통(苦痛)스럽고 괴롭지만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임을 깨달아야 한다. 


(08월04일 (목) <인내(忍耐)가 필요(必要)함>


(Q)~(창 32장) 예수님과 씨름했던 야곱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A)~○. 믿음의 선조(先祖)들은 어려움과 환란(患亂)중에도 끝까지 인내(忍耐)하면서 하나님께 인내(忍耐)하며 매달림으로써 하늘의 복(福)을 받을 수 있었다. 고통(苦痛)이나 환란(患亂)의 순간(瞬間)이라도 우리들 역시(亦是) 야곱의 인내심(忍耐心)이 절실(切實)히 필요(必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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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6과 전력(戰力)을 다해 싸움

                          (08월06일 (안) / 일몰: 19시 36분)


(07월31일 (일) <진리(眞理)의 영(靈)>


(Q)~(요 16:5~15) 진리(眞理)의 영(靈), 성령(聖靈)께서 우리를 위(爲)해 하시는 일과, 하실 수 없는 일을 설명(說明)해 보세요?


(A)~○. 진리의 영(靈)이신 성령께서는 죄(罪)를 깨닫게 해주시지만 회개(悔改)시킬 수는 없고, 진리(眞理)를 가르쳐 주실 수는 있지만 믿고 순종(順從)하도록 강요(强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속사업(救贖事業)에는 강제(强制)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人間)에게 주신 최고(最高)의 선물인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존중(尊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眞理)의 영(靈)이신 성령(聖靈)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변화(變化)시키실 수 있도록 의식적(意識的)으로 회개(悔改)와 순종(順從)의 문(門)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 자유의지(自由意志, 영어: free will)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능력이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맞는 말이다. 


○.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성령이 진리의 영입니까?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 성령은 성경말씀과 구별되지만 말씀을 떠나거나 거스르지 아니하시고 항상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셔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십니다.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예수님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 성령(聖靈)의 필요가 중요한 문제로 여김을 받지 않는 곳은 어디서든지 영적 결핍, 영적 암흑, 영적 타락과 죽음이 보인다.

○. 성령(聖靈)의 본질은 오묘에 속한 것임

엄청난 환경 아래서 영적인 무한한 기쁨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결정적인 확증은 없다. 거룩함이란 환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요, 빛 가운데서처럼 시련과 어두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요, 보는 대로 행치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요, 주저하지 않는 신뢰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다.


○. 성령(聖靈)의 본질은 오묘이다. 

사람들은 성령(聖靈)을 설명할 수는 없는데 이는 주께서 그들에게 성령(聖靈)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상적인 견해를 가지고 성경 절들을 모아 거기에 인간적인 해석을 가하나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를 굳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이런 오묘에 관하여 침묵이 금이다(행적 52).


○. 회개와 순종은 성령(聖靈)의 역사하심으로 이르러 옴

성령(聖靈)의 직무는 다음의 그리스도의 말씀에 분명히 명세 되어 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聖靈)이시다. 만일 죄인이 성령(聖靈)의 소생케 하시는 감화에 응답하면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일의 중요성에 관하여 깨우침을 받을 것이다.


○. 성령(聖靈)은 우리들의 구세주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효과 있게 만드는 새 생명을 주는 대리자로서 주신 바 되었다. 성령(聖靈)은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이룩된 위대한 제물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게 나타내며, 죄를 깨달은 영혼들에게 성경의 귀중한 사물들을 공개하시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계신다.


○. 죄를 깨닫게 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에 의의 원칙을 제시하신 성령(聖靈)께서는 이 세상 사물들로부터 애착심을 철회하시고 영혼들을 신성함에 대한 소망으로 채우신다(행적 52, 53).


○. 보혜사(保惠師)는 “진리의 성령(聖靈)”이라고 불리워진다. 

보혜사의 하시는 일은 진리를 밝히고 보존하는 데 있다. 그는 먼저 진리의 성령(聖靈)으로서 마음 가운데 거하시는 바 그리하여 보혜사가 되신다. 진리 가운데는 위안과 평화가 있으나 거짓 속에서는 참된 평화와 위안을 찾을 수가 없다(소망 671).


○. 성령(聖靈)의 약속은 조건 아래에 주어짐

“그(진리의 성령(聖靈))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聖靈)의 계속적인 임재와 도움이 없이는 말씀을 전파하는 보람이 없을 것이다. 이 분만이 거룩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시다. 진리가 성령(聖靈)으로 더불어 마음에 동반될 때만이 양심을 일깨우거나 생애를 변화시킬 것이다. 성령(聖靈)께서 기도하던 사도들에게 임하신 것은 신약 성경의 어느 한 책도 기록되기 전이었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아무런 복음 설교도 설교되기 전의 일이었다.  (요 16:4~15, 화잇주석)


(08월01일 (월) <하나님과 인간(人間)의 협력(協力)>


(Q)~(골로새서 1:28~29)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인간(人間)의 노력(努力)의 관계(關係)를 어떻게 설명(說明)하고 있습니까?


(A)~○. 인간(人間)의 노력(努力)은 하나님의 능력(能力)이 없이는 아무런 필요(必要)가 없다. 그리스도의 품성개발(稟性開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에 힘입어 우리의 최선(最善)의 노력(努力)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전적(全的)으로 믿는 자(者)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한 것이다.

사도(使徒) 바울은 (골1:29)에서 간증(干證)하기를 내 속에서 능력(能力)으로 역사(役事)하시는 이 즉(卽) 자신(自身)의 사도직(使徒職)의 능력(能力)의 원천(源泉)이 자기 밖에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있다. 즉 바울은 구주(救主)의 능력(能力)이 자신의 삶 속에서 강(强)하게 역사(役事)했기 때문에 증거(證據)할 수 있었다. (골 1:28~29, 만나주석)

 

○. <사도 바울이 힘을 다하여 수고(受苦)하노라 하는 말은>

바울이 사도직(使徒職)을 감당(堪當)할 수 있는 능력(能力)의 원천(源泉)이 그리스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사도(使徒)의 수동성(受動性) 즉 밖으로부터의 압력(壓力)에 의해 기계(機械)처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生覺)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능력(能力)이 진가(眞價)를 드러내는 것은 바울 자신의 사도적(使徒的) 소명의식(召命意識)의 철저성(徹底性)과 전적헌신(全的獻身)을 통(通)해 이루어진다는 사실(事實)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이방(異邦) 선교(宣敎)를 수행(隨行)하면서 괴로움을 받았지만 포기(抛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苦難)에 참여(參與)하고자 교회(敎會)를 위해 헌신(獻身)한 것은(골1:24절), 그리스도의 능력(能力)주심과 아울러 바울의 사도적(使徒的) 충성(忠誠)을 증거(證據)해 주는 것이다.  (골 1:28~29, 만나주석)


○.(예(例)1)

 <하나님과 인간(人間)의 협력(協力)>

의사(醫師)의 사업(事業)에 있어서도 치료봉사(治療奉仕)에 있어서 의사(醫師)는 그리스도와 동역자(同役者)가 되어야 한다. 구주(救主)께서는 심령(心靈)과 육체(肉體)를 다 같이 돌보셨다. 그분께서 가르치신 복음(福音)은 영적생명(靈的生命)과 육체적(肉體的) 회복(回復)에 대한 기별(寄別)이었다. 죄(罪)에서의 구원(救援)과 질병(疾病)의 치료(治療)는 함께 연결(連結)되어 있었다. 꼭 같은 봉사(奉仕)가 그리스도인 의사(醫師)에게 위탁(委託)되어 있다. 그는 동료(同僚) 인간들의 육체적(肉體的) 영적(靈的) 필요를 다 같이 해결(解決)해 주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해야 한다. 그는 병자(病者)들에게 긍휼(矜恤)의 사자(使者)가 되어 그들에게 병(病)든 육체(肉體)와 죄로 병(病)든 심령(心靈)을 위한 치료(治療)를 가져다주어야 한다. (치료 111-1) 


○.(예(豫)2) 

그리스도께서는 의료사업(醫療事業)의 머리가 되신다. 수석(首席) 의사(醫師)이신 그분께서는 인간의 고통(苦痛)을 해결(解決)해 주기 위하여 활동(活動)하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모든 의사(醫師) 곁에 계신다. 의사(醫師)는 육신(肉身)의 질병(疾病)을 치료(治療)하기 위하여 자연요법(自然療法)을 이용(利用)하는 한편, 그의 환자(患者)들에게 심령(心靈)과 육체(肉體)의 질병(疾病)을 다 같이 치료(治療)해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어야 한다. 의사(醫師)들은 그리스도께서 완성(完成)하시는 일을 다만 도와주고 있는데 불과(不過)하다. 그들은 치료(治療)하는 일에 있어서 천연(天然)의 역사(役事)를 도와주기 위하여 노력(努力)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자신(自身)은 치료자(治療者)가 되신다. 의사(醫師)는 생명(生命)을 보존(保存)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生命)을 나누어 주신다. (치료 111-2) 


(08월02일 (화) <훈련(訓練)된 의지(意志)>


(Q)~(창 3:6, 삼하 11:3,4) 순간적(瞬間的)인 감정(感情)에 휘둘려 잘못된 선택(選擇)을 했던 예(例)를 성경(聖經)에서 찾아보십시오.


(A)~⑴.(창세기 3:6)의 하와의 교훈(敎訓)은 선악과(善惡果)가 원래(原來) 이러했다기 보다는 하와가 경계심(警戒心)을 늦추고 탐욕(貪慾)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먹음직도 하고 …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렇게 행동(行動)으로 옮겼다. 

    ⑵.(삼하 11:3,4) 다윗의 교훈(敎訓)은 유혹(誘惑)이 일어났을 때 다윗은 그것을 제재(制裁)하지 않고 그의 마음의 생각(生覺)을 행동(行動)으로 옮기려는 결심(決心)을 하고 지붕에서 내려왔다. 죄(罪)를 제안(提案)한 유혹자(誘惑者) 앞에 다윗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막 8:33)는 말로 물리쳐야 했는데, 그 대신 유혹자(誘惑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音聲) 대신 사단의 음성(音聲)에 복종(服從)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感情)의 지배(支配)를 받는 대신 훈련(訓練)된 의지(意志)를 활용(活用)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基礎)한 바른 선택(選擇)을 통(通)해 정로(正路)를 따라가야 한다. 


○. 사람의 감각(感覺), 신경(神經), 감정(感情) 및 기관(器官)이 비루(鄙陋)한 정욕(情慾)의 방종(放縱)을 행하는 일에 초자연적(超自然的) 대리자(代理者)들로 말미암아 움직여졌다. 악마(惡魔)의 인(印)이 사람들의 얼굴에 찍혀 있었다. 사람의 얼굴은 그들을 사로잡은 악(惡)의 군대(軍隊)들의 표정(表情)을 반사(反射)하였다. 세상의 구주(救主)께서 보신 광경(光景)이 이러하였다. 무한(無限)히 정결(淨潔)하신 자께서 보실 때에 그 광경(光景)이 어떠하였으랴!”(소망, 36)


○. “요한은 순종(順從)을 통하여 구원(救援)을 획득(獲得)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순종(順從)은 사랑과 믿음의 열매라고 가르쳤다. 요한은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犯罪)하지 아니하나니 범죄(犯罪)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5, 6)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居)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거(居)한다면 우리의 감정(感情), 우리의 생각(生覺), 우리의 행동(行動)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一致)할 것이다. 성화(聖化)된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律法)의 교훈(敎訓)과 일치(一致)한다.”(행적, 563)


○. 자신(自身)이 즉시(卽時) 죽지 않는 것, 즉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는 유혹자(誘惑者)의 단호(斷乎)한 주장(主張)을 확증(確證)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목격(目擊)하고, 하와는 기만적(欺瞞的)인 의기양양(意氣揚揚)한 감정(感情)을 경험(經驗)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男便)과 그 느낌을 함께 나누기를 원(願)했다. 이것은 성경(聖經)이 아담을 “남편(男便)”이라고 부른 첫 번째 경우(境遇)이다. 그러나 “돕는 배필(配匹)”이 되는 대신에 그녀는 그를 파멸(破滅)시키는 도구(道具)가 되었다. 여자(女子)가 “자기와 함께 한 남편(男便)에게도 주”엇다는 진술(陳述)은 남편이 유혹(誘惑)의 현장(現場)에 내내 말없이 그녀와 함께 서 있었음을 의미(意味)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 “자기와 함께” 먹고 예상(豫想)되는 유익(有益)을 함께 나누도록 그 실과(實果)를 그에게 주었다. (부조와 선지자, 56). (창 3:6, 재림교주석)


○. 하와는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점(利點)을 가진 나무라고 상상(想像)하였다. 말하자면 무서워할 필요(必要)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지혜(智慧)롭게 하는 데 필요(必要)한" 나무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나무들보다 훨씬 좋은 점이 많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보았다" 말하자면 하와는 마귀(魔鬼)가 그녀에게 일러준 대로 그렇게 이해(理解)하게 되고, 그런 생각(生覺)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곧 하와는 뱀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보았다는 의미(意味)이며, 또 그것을 먹었기 때문에 뱀은 이처럼 말할 수 있는 재능(才能)과 이성(理性)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의미(意味)라고 생각한다. 이로 말미암아 하와는 사람을 지혜(智慧)롭게 하는 능력(能力)이 그 나무에 있다고 추론(推論)하게 되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 보암직도 하고. ‘눈이 추구(追求)하는’이란 의미(意味)로 육체(肉體)의 안목(眼目)과 정욕(情慾)(벧전 2:11)에 사로 잡혀 허상(虛想)을 보고, 느낀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죄악(罪惡)에 빠지는 것을 엄(嚴)히 경계(警戒)하셨다(마 5:28, 29). (창 3:6, 만나주석)


○. 다윗이 잠시 멈춰 서서 기도(祈禱)하기 위하여 생각을 하늘로 향(向)했더라면, 그의 마음을 왕(王)의 직무(職務)를 수행(隨行)하기 위한 책임(責任)에 바치고 국가(國家)의 공무(公務)들을 관장(管掌)하는 데 전념(專念)했더라면 원수(怨讐)의 주문(呪文)은 풀려버렸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다윗의 행동은 매우 독실(篤實)한 사람이 여호와를 버리게 될 때에 일순간(一瞬間)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슬픈 교훈(敎訓)이다. 그 경험(經驗)은 마찬가지로 유혹(誘惑)받을 수 있는 타인(他人)들에게 교훈(敎訓)으로 기록(記錄)되었다. 위대(偉大)한 영웅(英雄)이나 성인(聖人)이라고 해서 그의 죄를 덮어 주고 면제(免除)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다윗의 죄에는 깊은 회개(悔改)와 거룩한 용서(容恕)가 뒤따랐지만, 악(惡)의 열매는 그의 생애(生涯)의 남은 날들을 음울(陰鬱)하게 했다. (삼하 11:3~4, 재림교주석)


○. 강(强)한 사람들이 흔들릴 때(약 1:8)(행 21:20-26 주해 참조)

최고(最高)로 인정(認定)받는 사람도 큰 실수(失手)를 저지를 것이다. 인간 대리자(代理者)에게 부여(附與)된 책임(責任)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명령(命令)하고 통제(統制)하는 그의 지위(地位)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가 만약 주의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지성(知性)과 감정(感情)을 왜곡(歪曲)시키는 일에 그는 틀림없이 더욱 더 큰 해독(害毒)을 끼친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확고(確固)한 원칙(原則) 위에서 행동(行動)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파괴적(破壞的)인 감화(感化)를 정면(正面)으로 가로 막아야만 하였다. 이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도 유익(有益)을 얻게 하려 함이요, 그 교훈(敎訓)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엄숙(嚴肅)한 경고(警告)가 되게 하기 위(爲)함이며, 그들이 성실(誠實)의 길에서 실수(失手)하지 않고 원칙(原則)을 고수(固守)하게 하려 함이다.


○. 베드로의 모든 실패후(失敗後)에, 그의 타락(墮落)과 회복후(回復後)에, 긴 세월(歲月)의 봉사(奉仕), 그리스도와의 긴밀(緊密)한 관계(關係), 원칙(原則)을 철저(徹底)히 실행(實行)함, 그가 받은 모든 교훈(敎訓)과 말씀을 설교(說敎)하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의 은사(恩賜)와 지식(知識)과 큰 영향력(影響力)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두려워해서였건 존경(尊敬)을 받기 위해서였건 간(間)에 그가 복음(福音)의 원칙(原則)을 회피(回避)하고 속였다는 것은 이상(異常)하지 않은가? 그가 흔들리고 이중적(二重的) 입장을 취(取)하다니 이상(異常)하지 않은가? … 매일(每日) 그리스도의 은혜(恩惠)가 꼭 필요하다. 그의 비길 데 없는 은혜(恩惠)만이 우리의 발이 실족(失足)치 않도록 하실 수가 있다(원고 122, 1897).(갈 2:11~12, 화잇주석)


(08월03일 (수) <단호(斷乎)한 선택(選擇)> 


(Q)~마태복음 5:29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의 참된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


(A)~○.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분명(分明)하고도 단호(斷乎)히 확실(確實)한 실천(實踐)을 요구(要求)하시는데 이러한 때는 우리가 감당(堪當)하기 힘들고 고통(苦痛)스럽고 괴롭지만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임을 깨달아야 한다. 


○. 그리스도는 행동(行動)을 유발(誘發)하는 동기 곧 행동(行動)의 원인(原因)이 된 태도(態度)나 마음의 구조(構造)에 주의(注意)를 돌리기 위해 행동(行動) 이면(裏面)을 살폈다. 여기서 그는 죄가 삶 속으로 들어오는 통로(通路)인 감각신경계(感覺神經系)를 가리키기 위해 동기(動機)나 태도(態度)의 이면(裏面)을 살피고 있다. 대부분(大部分) 죄의 가장 강력(强力)한 유인(誘引)은 시각신경(視覺神經), 청각신경(聽覺神經) 그리고 기타 감각신경(感覺神經)을 통해 마음에 이르러 온다(사도행적, 518).


○. 죄를 연상(聯想)시키는 것들을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것을 거절(拒絶)한 사람은 죄(罪)된 생각(生覺)을 멀리할 수 있다. 순간적(瞬間的)으로 악(惡)한 생각이 자신의 의식(意識)에 번뜩일 때 즉시 그 악한 생각을 물리치는 사람은, 기회(機會)가 생겼을 때 죄를 범하도록 마음에 조건반사(條件反射)를 일으키는 습관적(習慣的)인 사고양식(思考良識)의 발달(發達)을 피한다. 그리스도는 “사단의 궤변(詭辯)에 반응(反應)할 아무것도 그 속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죄 없는 생애를 살았다(시대의 소망, 123).


○. <빼어 내버리라. 는 말씀은>

어떤 의미(意味)에서 영생(永生)을 잃는 것보다 이 세상을 장님이나 불구(不具)로 살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기서 비유법(譬喩法)을 사용(使用)하고 있다. 그는 신체(身體)의 절단(切斷)을 요구(要求)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生覺)의 통제(統制)를 요구(要求)한다. 악(惡)한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은 완전(完全)히 자신을 장님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效果)가 있으며, 시력(視力)이 보존(保存)되고 그것을 좋은 것들에 사용할 수 있는 부가적(附加的) 이익(利益)을 얻는다. 


○. 여우는 발이 덫에 단단히 걸려 있을 때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의 발을 물어 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마뱀은 자신의 꼬리를 희생(犧牲)시키고, 바닷가재는 자신의 집게발을 희생(犧牲)시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눈을 빼어버리거나 손을 찍어버리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악(惡)을 경계(警戒)하기 위(爲)해 의지(意志)가 동반(同伴)되어야 하는 결연한 행동(行動)을 비유(譬喩)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눈과 언약(言約)을 세운” 욥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현명(賢明)하다(욥 31:1; 참조 고전 9:27).(마 5:29~30, 재림교주석)


○. 죄를 짓는 부분(部分)을 잘라 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意味)하는 바는 문자적(文字的)인 것보다 상징성(象徵性)이 강(强)한 교훈(敎訓)으로서 예수의 제자(弟子)들은 죄의 문제(問題)를 단호(斷乎)하고도 철저(徹底)하게 해결(解決)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强調)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想像力)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恩賜)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因)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想像力)은 오염(汚染)되게 될 것이다. 성적(性的)인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想像)으로부터 시작(始作)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天國)의 의(義)를 추구(追求)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重要)한 것이다(빌 4:8). 


○.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反應)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犯罪)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Scott). 실로 이같이 죄악(罪惡)의 시초(始初)에서든 그 과정(過程)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罪惡)이 자각(自覺)되는 순간(瞬間)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合理化)도 용납(容納)치 않고 단호(斷乎)한 결단(決斷)으로써 죄악(罪惡)의 본질(本質)을 근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克服)하는 유일(唯一)한 지혜(智慧)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境遇) 남는 것은 죄의 대가(代價)인 지옥(地獄)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根本的)인 문제(問題)이기 때문에 예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 있다. (마18:8, 9). (마 5:29~30, 만나주석)


(08월04일 (목) <인내(忍耐)가 필요(必要)함>


(Q)~(창 32장) 예수님과 씨름했던 야곱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A)~○. 믿음의 선조(先祖)들은 어려움과 환란(患亂)중에도 끝까지 인내(忍耐)하면서 하나님께 인내(忍耐)하며 매달림으로써 하늘의 복(福)을 받을 수 있었다. 고통(苦痛)이나 환란(患亂)의 순간(瞬間)이라도 우리들 역시(亦是) 야곱의 인내심(忍耐心)이 절실(切實)히 필요(必要)하다. 


○. 우리는 야곱의 불굴(不屈)의 신앙(信仰)과 엘리야의 굳센 인내력(忍耐力)을 가지고 하늘 아버지께 우리의 탄원(歎願)을 드릴 수 있고 그 분께서 약속(約束)하신 바를 모두 요구(要求)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寶座)의 명예(名譽)를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成就)하신다. (선지자와 왕, 156, 157.) (투쟁, 211)


○. <야곱의 환난(患難)의 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닥칠 경험(經驗)의 정도(程度)를 야곱이 천사(天使)와 씨름한 경험(經驗)과 비교(比較)하여 설명(說明)하고 있다(창 32:24-26). 야곱은 과거(過去)의 잘못을 복수(復讐)하기 위해 자기를 죽일 채비를 하고 있는 형 때문에 떨고 있었다. 이 위기(危機)에 대비(對備)하여 그는 밤을 새워 기도(祈禱)하였다. 그는 마음의 부담(負擔)을 느끼며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한, 야곱은 자기가 잘못 행했던 모든 것을 바로 잡고자 했다. 끈질긴 인내(忍耐)와 믿음으로 그는 날이 새기 전, 하나님의 축복(祝福)의 확신(確信)을 받았다. 야곱의 후손(後孫)들이 당할 경험(經驗)을 미리 내다보면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침공 시(侵攻時) 그들의 조상(祖上) 야곱과 비슷한 고난(苦難)의 경험(經驗)을 그들이 통과(通過)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렘 34:7). 그러나 이러한 큰 “환난(患難)”에 대한 예언(豫言)과 함께 선지자(先知者)는 모든 신실(信實)한 영혼(靈魂)들을 “그가 이에서 구(求)하여” 내시리라는 확신(確信)을 준다.”(화잇주석, 렘 30:7)


○. <야곱의 믿음과 인내력(忍耐力)>

가족(家族)들이 그의 고통(苦痛)을 목격(目擊)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그 장소(場所)에서 떠나보낸 후 야곱은 하나님께 탄원(歎願)하기 위하여 홀로 남았다. 그는 자기의 죄를 자복(自服)하고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감사(感謝)한 마음으로 인정(認定)한다. 동시(同時)에 그는 매우 겸손(謙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祖上)들과 맺으신 언약(言約)과, 벧엘에서 이상(異像)을 보던 밤에, 또한 유랑(流浪)하는 땅에서 그에게 주신 약속(約束)을 성취(成就)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歎願)한다. 그의 생애(生涯)에 위기(危機)가 다가왔다. 모든 것이 위험(危險)에 처해 있다. 


○. 어두움과 외로움 속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기도(祈禱)를 계속(繼續)하고 있다. 갑자기 어떤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는다. 그는 그의 원수(怨讐)가 자기의 생명(生命)을 빼앗으려고 하는 줄로 생각한다. 그는 죽을힘을 다하여 그 공격자(攻擊者)와 씨름을 한다. 날이 샐 무렵이 되자 그 낯선 사람은 초인간적(超人間的)인 힘을 발휘(發揮)한다. 한 번 건드리자 힘이 강한 야곱은 마치 마비(痲痹)된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넘어져버리고 속절없는 상태(常態)에서 정체불명(正體不明)의 그 적대자(敵對者)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애원(哀願)한다. 야곱은 방금 자기가 싸운 상대(相對)가 언약(言約)의 천사(天使)임을 이제 깨닫는다. 거의 모든 기력(氣力)이 빠지고 극심(極甚)한 고통(苦痛)을 당하면서도 그는 그의 목적(目的)을 포기(抛棄)하지 않는다. 


○. 그는 자기(自己)의 죄(罪) 때문에 오랫동안 곤란(困難)과 자책(自責)과 고통(苦痛)을 참아왔다. 이제 그는 그것이 용서(容恕)받았다는 확증(確證)을 얻어야 한다. 그 거룩한 방문자(訪問者)는 바야흐로 떠나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곱은 그에게 매달려서 축복(祝福)해 달라고 탄원(歎願)한다. 그 천사(天使)는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강권(强勸)한다. 그러나 그 족장(族長)은 “하나님이 내게 축복(祝福)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고 외친다. 


○. 얼마나 놀라운 확신(確信)과 굳센 의지(意志)와 인내력(忍耐力)이 여기에 묘사(描寫)되어 있는가! 그것이 만일 오만(傲慢)하고 참람(僭濫)된 요구(要求)였다면 야곱은 즉시 멸망(滅亡)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간구(懇求)는 그가 자신의 약(弱)하고 무가치(無價値)한 것을 고백(告白)하고 더욱이 언약(言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의지(意志)하는 자(者)임을 나타내는 증거(證據)였다. 그는 “천사(天使)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호 12:4)”(쟁투, 616-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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