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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제1과-목자의 시련 -(핵심 Q & A 및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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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6-28 00:47 조회1,4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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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과 목자(牧者)의 시련(試鍊)

                                                 (2022년 07월02일 (안) / 日沒: 19시57분)

 

<서언(緖言)>

2022년 제3기의 총 주제(主題)는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苦難)”이라는 주제로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신 창조주(創造主)”에 관하여 공부(工夫)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기(期) 교과(敎科)의 맥(脈)은 창조주 하나님(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苦難)과 배신(背信)당하심과 멸시(蔑視)받으심은, 죄(罪)짓는 것이 밥 먹듯 하고 숨 쉬는 것 같이 쉬운 죄인들의 구원(救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하시고 심지어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이며, 우리 믿음의 성도(聖徒)들이 당하는 고통(苦痛)과 고난(苦難)과 멸시(蔑視)와 조롱(嘲弄)등등 여러 형태(形態)의 고난(苦難)을 당하는 것 역시 믿음의 성도들을 잊으셨거나 버리셔서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타락(墮落)한 인류(人類) 가운데에서 공동(共同)의 숙명(宿命)을 나누고 있음을 의미(意味)하는 것으로 마치 쇠를 녹이는 풀 무불 가운데 “도가니”의 용도(用途)로 생각(生覺)하여 불순물(不純物)의 제거(除去)로 인한 정금(正金)같은 순수성(純粹性)의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과정(過程)으로 인식(認識)하고 예수님을 굳게 붙잡는 믿음으로 이번 제3기 교과 공부가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통해 매일(每日)의 삶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關係)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배울 뿐만 아니라 인생의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앞에서 어떤 자세(姿勢)를 취(取)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06월26일(일) <여정(旅程)의 인도자(引導者) : 목자(牧者)>

 

(Q)~(시 23, 사 40:11, 요 10:14~16) 성경(聖經)에 기록(記錄)된 목자(牧者)의 역할(役割)과 특성(特性)은 무엇입니까?

 

(A)~○. 목자는 양(羊)이나 가축(家畜)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양(羊)들을 인도(引導)하고, 보호(保護)하고, 관심(關心)을 갖고 끝까지 봉사(奉仕)해야 하듯이, 선(善)한 목자(牧者)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보호(保護)하시며 결국(結局)은 영원(永遠)한 하늘 안식처(安息處)로 이끌어 주신다.

 

(06월27일(월) <지나는 곳들>

 

(Q)~(시 23) 목자(牧者)가 인도(引導)하는 길이 “의(義)의 길”인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A)~○.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인도(引導)하실 때 때로는 평탄(平坦)한 길로 때로는 험(險)한 길로 이끄시기도 하신다. 이런 우리의 인생 여정(旅程)들은 훈련(訓練)의 과정(過程)이라는 것임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그 이유(理由)는 목자(牧者)되시는 예수님만 따라 가면 결국(結局)은 목자(牧者)의 집인 하늘 가나안에 이르기 때문이다.

 

(06월28일(화) <예상(豫想)치 못한 우회로(迂廻路) 1: 골짜기>

 

(Q)~(시 23:4) “사망(死亡)의 음침(陰沈)한 골짜기”를 마주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이며, 설혹(設或) 어두운 골짜기로 “잘못 인도받았다”라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순간 하나님께 어떠한 반응을 했습니까?

 

(A)~○. 양(羊)되는 인간이 목자(牧者)(예수님)을 믿고 따라 갈지라도(즉 신실(信實)한 신앙생활(信仰生活)을 철저(徹底)히 한다 할지라도 때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예상(豫想)치도 못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극한(極限)의 질병(疾病)이나, 삶의 위기(危機)가 찾아온다)할지라도, 그러한 경우(境遇)를 만나면 예상(豫想)치 못한 뜻밖의 우회(迂廻) 도로(道路)를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반듯이 믿어야 한다. 설혹(設或)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회(迂廻)할지라도 목자(牧者)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記憶)하고 신뢰(信賴)하는 것이 핵심(核心)이다.  

 

(06월29일(수) <예상(豫想)치 못한 우회(迂廻)로 2: 원수(怨讐)의 목전(目前)> 

 

(Q)~(시편23:5, 마 5:44, 롬 12:18~21) 인생여정(人生旅程)에서 살다보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원수(怨讐)”라고 할 만한 상대(相對)와 마주 하게 된다. 그럴 때 즉 “원수(怨讐)들에게 둘러싸일 때 그대는 원수(怨讐)를 어떻게 대합니까? 또한 성도(聖徒)로써<우리를 인도(引導)하고 계신 목자(牧者)를 믿는다면 삶에서 마주하는 원수(怨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A)~○. 죄인인 우리 인생들은 인생여정(人生旅程) 가운데 생각하지 못한 장애물(障碍物)과 보이는 원수(怨讐)와 보이지 않는 원수(怨讐)들에게 둘려 쌓여 살게 된다. 그러한 경험가운데에서 많은 경우 인간의 방법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境遇)나 또는 근심걱정으로 병(病)들거나 폐인(廢人)이 되는 경우(境遇)들이 많다, 그러나 (시편23:5절)에서 다윗의 경험(經驗)과 교훈(敎訓)을 나의 것 우리의 믿음으로 받아들여 선(善)한 목자(牧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우리에게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적용(適用)하자.

 

(06월30일 (목) <확실(確實)한 약속(約束)> 

 

(Q)~(시편 23:6)에서 다윗이 확신(確信)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事實)은 무엇입니까? 

 

(A)~○. 비록 우리가 처(處)해 있는 골짜기가 아무리 깊고 우리의 원수(怨讐)가 아무리 집요(執拗)하게 공격(攻擊)해 올지라도, 하나님의 선(善)하심과 인자(仁慈)하심, 의 두 가지 사실을 다윗은 확신(確信)하였다. 우리의 인생여정(人生旅程)을 끝까지 이끄시는 예수님의 인도(引導)하심에는 의심(疑心)할 여지(餘地)가 없다. 죄인들의 구원자(救援者) 예수님께서 이러한 선(善)하심과 인자(仁慈)하심으로 갈바리 십자가(十字架)에서 고난(苦難)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末尾附錄>             

 

  제1과 목자(牧者)의 시련(試鍊)


(06월26일(일) <여정(旅程)의 인도자(引導者) : 목자(牧者)>

 

(Q)~(시 23, 사 40:11, 요 10:14~16) 성경(聖經)에 기록(記錄)된 목자(牧者)의 역할(役割)과 특성(特性)은 무엇입니까?

 

(A)~○. 목자는 양(羊)이나 가축(家畜)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양(羊)들을 인도(引導)하고, 보호(保護)하고, 관심(關心)을 갖고 끝까지 봉사(奉仕)해야 하듯이, 선(善)한 목자(牧者)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보호(保護)하시며 결국(結局)은 영원(永遠)한 하늘 안식처(安息處)로 이끌어 주신다.

 

○. 목자(牧者)는 구약시대(舊約時代)에서 가장 보편적(普遍的)인 직업(職業)이었다. 목자는 양이나 가축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은유적(隱喩的)으로 볼 때 다스리는 사람, 즉 감독(監督)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신약성경(新約聖經)에 나타난 목회자(牧會者)의 의미(意味)를 살펴보면 헬라어 '포이멘'을 번역(飜譯)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목자(牧者)를 의미(意味)하고 있다.

 

○. <자기를 희생(犧牲)하는 목자(牧者)>

 예수님은 거룩한 사랑과 자기희생(自己犧牲)의 극치(極致)를 보여주신다. 그분은 자신의 양(羊) 떼를 천국(天國)으로 안전(安全)하게 데리고 가기 위해서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을 감당(堪當)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나는 선(善)한 목자(牧者)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하나님은 세상에서 이러한 주님을 본(本)받아 종이자 주인(主人)으로서, 더 나아가 목자가 지녀야 할 지도력(指導力)을 발휘(發揮)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목자(牧者)의 사랑을 베풀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목자의 지도력(指導力)으로 커다란 자기희생(自己犧牲)을 감수(甘受)해야 한다.

 

○. <인도(引導)하는 목자(牧者)>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라고 고백(告白)하면서 기뻐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信賴)했던 목자(牧者)이다.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인도하기 위해 최선(最先)을 다할 수 있었다. 풀이 많고 신선(新鮮)한 물이 있는 곳에서 양(羊)들이 마음껏 풀을 뜯다가 안전(安全)하게 돌아오게 하려고 곳곳을 둘러보고, 가장 좋은 풀밭으로 안전하게 갈 길을 찾아다녔다. 목자는 결코 우연(偶然)히 푸른 초장(草場)을 발견(發見)하지 않는다.

 

○. <보호(保護)하는 목자(牧者)>

다윗은 양 떼를 보호(保護)하는 것이 목자(牧者)의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分明)히 의식(意識)했다. 특히 위험(危險)을 닥쳤을 때 목자는 양들을 보호(保護)해야 한다. “내가 사망(死亡)의 음침(陰沈)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편 23:4)

 

○. 성경(聖經)이 증언(證言)하는 바에 의(依)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목자(牧者)로 소개(紹介)하고 있다. "나는 선(善)한 목자(牧者)라. 선한 목자는 양(羊)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羊)도 제 양(羊)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 인니라. 나는 선(善)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羊)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고 하였다. 또한 (누가복음 15:7절)에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 예수님의 모습(模襲)을 발견(發見)할 수 있는데, 그 모습에서 참 목자가 어떤 것이냐를 배울 수 있다.

 

○. (첫째), 목자(牧者)는 양(羊)들을 아끼고 그들에 대한 성실(誠實)하고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앞서 소개(紹介)한 (요한복음10:11-15절)에 관한 제반사정(諸般事情)들 뿐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길 잃어버린 양이 있다면 찾아가고 상(傷)한 자는 싸매어 주며, 병(病)든 양을 돌보는 목자의 모습(模襲)을 본다.

(요한복은 17:15절)에 기록(記錄)된 예수님의 제사장(祭司長)으로서의 기도(祈禱)에는 세상(世上)에 사는 모든 신도(信徒)들을 언급(言及)하시면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爲)함이 아니라 오직 악(惡)에 빠지지 않게 보전(保全)하시기를 위(爲)함이니 이다."

이런 말씀에 의(依)하면, 목자는 양(羊)들의 신변(身邊)에 대해 성실(誠實)한 관심(關心)을 갖고 양(羊)때를 돌보아야 한다.

 

○. (둘째), 목자(牧者)는 양(羊)들을 앞장서서 인도(引導)한다. 

(요한복음 10:3-4절)에 보면 "양(羊)의 이름을 각각(各各)불러 인도(引導)하여 내고", "앞서 가면 그들이 따라온다."는 말씀이 있다. 목자는 언제나 모든 신도(信徒)들의 앞에서 그들이 사회악(社會惡)에 빠지지 않고 사회(社會)를 도피(逃避)하려는 심성(心性)을 제어(制御)할 수 있도록 부단(不斷)히 그들의 가는 길을 제시(提示)해야 한다.

 

○. (셋째), 목자(牧者)는 양(羊)들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奉仕)해야 한다. 

이런 목자의 정신(精神)은 (요한복음 10:15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양(羊)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또한 (갈라디아서 4:19절)에는 "나의 자녀(子女)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形狀)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爲)하여 해산(解産)하는 수고(受苦)를 하노니"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犧牲)의 양(羊)처럼 우리의 죄(罪)를 대신(代身) 지시고 죽으심과 같이 오늘의 목자들도 양떼를 보존(保存)하고 양(羊)들의 영적성장(靈的成長)을 위하여 피 흘리는 희생(犧牲)이 있어야 한다.

 

○. (넷째), 목자(牧者)는 울타리 밖에 있는 양(羊)들에게도 관심(關心)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목자의 너그러움과 아량 깊은 모습이 특히 누가복음에 많이 나타나 있다. 잃은 양의 비유(譬喩), 탕자(蕩子)의 비유(譬喩), 그리고 선(善)한 사마리아인의 비유(譬喩)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잃어버린 자(者), 버림받은 자(者), 이방인(異邦人)이라고 조롱(嘲弄)받는 자(者)들도 예수의 관심(關心)과 사랑의 대상(對象)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로서의 본(本)을 보여 주셨고, 제자(弟子)들 역시(亦是) 그러한 스승이 모습에서 자신들의 할 일을 찾아 주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목자의 직무(職務)에 관하여 "성령(聖靈)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監督者)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마치 목자가 양을 치는 것에 비유(譬喩)하였다. 이러한 목자의 모습은 사도들의 일관(一貫)된 모습이었고 모든 목회자의 이상형(理想型)이 되었다

 

○. <선(善)한 목자(牧者) 그리스도>

나는 선(善)한 목자라 선(善)한 목자는 양(羊)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시 23장, 화잇주석)

 

○. 이 시는 그저 단순한 목자의 시(詩)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의 양(羊)떼들을 인도하여 “쉴 만한 물가”에 있는 “푸른 초장(草場)”에서 쉬면서 풀을 먹도록 하고 또한 광야(廣野)의 위험(危險)에서 그것들을 지켜 주는 애정(愛情)어린 목자의 모습뿐 아니라 자기의 손님을 위해 풍성(豊盛)한 식사(食事)와 지극정성(至極精誠)의 보호(保護)를 베푸는 은혜(恩惠)로운 주인(主人)의 모습도 묘사(描寫)되어 있다. 이 시(詩)는 일생 동안 그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이끌어 주고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들을 자기의 손님으로 후대(厚待)해 주는 여호와께 대한 절대적(絶對的) 확신(確信)의 신앙고백(信仰告白)으로 끝난다.

 

○. 이 시(詩)는 세 연(連)으로 나뉘어 있다. 처음 두 연(1~3절과 4절)에는 애정(愛情) 깊은 인도(引導)와 보호(保護)에 대한 개념(槪念)이 나타나 있고, 셋째 연(5, 6절)에는 주인(主人)이 제공(提供)하는 후한 대접(待接)에 관한 개념이 드러나 있다.

시 23편에서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색채(色彩)가 없다. 이 시(詩)는 그 호소(呼訴)에 있어서 보편적(普遍的)이다. 유대의 거친 언덕들에서 목자(牧者)로 지낸 경험(經驗)과 또한 후에 수도(首都)에 있는 동방(東邦) 왕궁(王宮)의 부유(富裕)한 왕으로서의 경험은, 다윗으로 거룩한 서정시(抒情詩)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 시(詩)를 짓기에 적합(適合)한 인물(人物)이 되게 하였음이 분명(分明)하다.

표제(標題)에 대해서는 (교육, 164 ; 시대의 소망, 476, 477; 부조와 선지자, 413)을 참조하라.

 

○. <나의 목자(牧者)>

여호와를 목자로, 그의 백성을 양(羊)떼로 나타내는 비유(譬喩)는 성경(聖經)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징적(象徵的) 표현(表現)이 가장 먼저 발견(發見)되는 곳은 (창 48:15)이다. 이 절(節)에 나오는 “나를 기르신 하나님”은 문자적(文字的)으로는 “나의 목자(牧者)”이다(참조 창 49:24). 또한 시편(78:52; 80:1; 119:176)과 선지서(先知書)들(사 40:11; 겔 34장; )과 신약(눅 15:3~7; 요 10:1~18; 21:15~17; 히 13:20; 벧전 2:25; 5:4)에서도 이 비유적(比喩的) 표현(表現)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비유(譬喩)의 아름다움과 의미(意味)를 이해(理解)하고 감상(感想)하기 위해서는 유대 광야(廣野)의 험한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목자와 양떼 사이의 친밀(親密)한 생활(生活), 그중에서도 특히 그들만이 외따로 떨어져 함께 보내는 긴 고독(孤獨)의 시간 동안에 피차(彼此)간에 형성(形成)되는 서로에 대한 강(强)한 애정(愛情)에 관하여 알아야만 한다.

 

○.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絶對的) 신뢰(信賴)를 나타내는 말이며. 이 구절(句節)이 이 시(詩)의 핵심이다.

 

(06월27일(월) <지나는 곳들>

 

(Q)~(시 23) 목자(牧者)가 인도(引導)하는 길이 “의(義)의 길”인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A)~○.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인도(引導)하실 때 때로는 평탄(平坦)한 길로 때로는 험(險)한 길로 이끄시기도 하신다. 이런 우리의 인생 여정(旅程)들은 훈련(訓練)의 과정(過程)이라는 것임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그 이유(理由)는 목자(牧者)되시는 예수님만 따라 가면 결국(結局)은 목자(牧者)의 집인 하늘 가나안에 이르기 때문이다.

 

○. <의(義)의 길>

유대의 거친 지형(地形)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들이 깊은 와디(wadi, 아라비아, 시리아 등에 있는 우기(雨期) 이외(以外)에는 물이 없는 강(江)-역자(譯者) 주)들이 가로지르는 고지대(高地帶)를 횡단(橫斷)할 때 바른길을 찾지 못하면 시간(時間) 낭비(浪費)뿐 아니라 큰 어려움에 봉착(逢着)하기가 매우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허락(許諾)하기만 하면, 비록 당시(當時)에는 그 길이 쉽지 않은 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引導)하신다.  (시편 23장, 재림교주석)

 

○.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義)의 길로 인도(引導)하시는 도다>

여기서 ‘의(義)의 길’이란 도덕적(道德的)으로 의(義)로운 삶을 의미(意味)한 다기 보다는(Briggs) 평탄(平坦)의 길, 형통(亨通)의 길을 뜻한다(Calvin, Raw - linson).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의 종을 평탄과 형통의 길로 인도하심으로써 목자로서의 자비(慈悲)하신 성품(性稟)을 보여주신 것이다. 한편, 이 말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란 표현과 함께 언급(言及)되고 있으므로 그 인도(引導)의 궁극적(窮極的)인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榮光)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편 23장, 만나주석)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廣野)에서 보낸 40년의 세월이 약속(約束)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訓練)의 시간(時間)이었던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시련(試鍊)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準備)해 두신 영원(永遠)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訓練)의 시간입니다. 비록 외롭고 힘들 때도 있지만, 곁에서 함께 하시며 항상(恒常)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날마다 경험(經驗)하며 살아가는 축복을 경험누리며 간증(干證)하는 삶이 되어야 해야겠습니다. 

 

(06월28일(화) <예상(豫想)치 못한 우회로(迂廻路) 1: 골짜기>

 

(Q)~(시 23:4) “사망(死亡)의 음침(陰沈)한 골짜기”를 마주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이며, 설혹(設或) 어두운 골짜기로 “잘못 인도받았다”라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순간 하나님께 어떠한 반응을 했습니까?

 

(A)~○. 양(羊)되는 인간이 목자(牧者)(예수님)을 믿고 따라 갈지라도(즉 신실(信實)한 신앙생활(信仰生活)을 철저(徹底)히 한다 할지라도 때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예상(豫想)치도 못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극한(極限)의 질병(疾病)이나, 삶의 위기(危機)가 찾아온다)할지라도, 그러한 경우(境遇)를 만나면 예상(豫想)치 못한 뜻밖의 우회(迂廻) 도로(道路)를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반듯이 믿어야 한다. 설혹(設或)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회(迂廻)할지라도 목자(牧者)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記憶)하고 신뢰(信賴)하는 것이 핵심(核心)이다.  

 

○. <(시편23:4) 사망(死亡)의 음침(陰沈)한>

히브리어 찰마웨트(s.almawet). 첼(s.el), “그림자”와 마웨트(mawet), “죽음”에서 유래한 단어. 이 단어들은 둘 다 구약에서 매우 흔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첼은 49회에 걸쳐 쓰였는데 그중 45회가 “그림자”로 번역되었으며, 마웨트는 157회 중에 128회가 “죽음”으로 번역되었다. 현대의 학자들 중에는 찰마웨트를 “검게 되다”라는 의미의 악갓어 어근 찰라무(s.ala-mu)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 “흑암(黑暗)”으로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다. 70인 역은 이 단어의 어원(語源)에 대한 전통적(傳統的) 견해(見解)를 지지한다. 우가릿어(참조 68, 69쪽)에서는 찰마웨트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찾아볼 수 없다. 현존하는 우가릿 문헌들 중에서 이 단어가 발견되는 것은 불명료(不明瞭)한 구절(句節) 가운데 나오는 단 한 번의 경우(境遇)뿐이다. 번연(Bunyan)은 “사망(死亡)의 음침(陰沈)함”이라는 구절(句節)을 자신의 위대(偉大)한 풍유적(諷諭的) 작품(作品)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의 독자(讀者)들에게 특별(特別)히 귀중(貴重)한 구절(句節)이 되게 했다. (시편 23장, 재림교주석)

 

○.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이것으로 충분(充分)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깨닫는 것 외(外)에 더 이상(以上) 필요(必要)한 것이 없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예수님 외(外)에는 세상(世上)에서 더 바랄 것이 없나이다.”

 

○. <(시편23:4) 사망(死亡)의 음침(陰沈)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에 해당(該當)하는 히브리어 ‘찰마웨트’은 그림자를 뜻하는 ‘첼’과 죽음을 의미(意味)하는 ‘무트’의 합성어(合成語)인 것으로 보인다(TWOT). 그리고 여기서 ‘무트’는 죽음 그 자체를 의미(意味)한 다기 보다는 ‘그림자’를 수식(修飾)하는 최상급(最上級) 형용사(形容詞)로 사용(使用)된 것 같다(Thomas). 이렇게 볼 때 이 말은 ‘매우 짙은 그늘’, 또는 ‘흑암(黑暗)’(thick darkness)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聖經)의 용례(用例)를 보면, 이 말은 광산통로(鑛山通路)의 암흑(暗黑)(욥기 28:3), 사자(死者)의 거처(居處)의 어두움(욥기 10:2 1f., 38:17), 창조(創造) 이전(以前)의 어두움(암 5:8)등에 적용(適用)되었다. 이와 같이 이 말은 어두움을 의미(意味)하는 히브리어 단어(單語) 중 가장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죽음을 상징(象徵)한다 한편, 이처럼 어두운 골짜기는 산지(山地)가 많이 있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쉽게 발견된다. 그러한 곳에서 목자(牧者)없는 양(羊)떼들은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며, 기타 여러 가지 죽음의 위험(危險)을 당(當)할 수밖에 없다.

 

○.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망(死亡)의 음침(陰沈)한 골짜기를 지나는 양떼 곁에는 항상(恒常) 목자(牧者)가 있다. 그래서 그 양(羊)떼들은 안전(安全)하게 골짜기를 지날 수 있다. 지금 어떠한 해(害)롤 당할지도 모르는 환난(患難)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으면서도 다윗이 그 해(害)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처럼 목자(牧者)이신 하나님의 인도(引導)와 보호(保護)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시편23장, 만나주석)

 

○.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지팡이’ 와 ‘막대기’는 목자(牧者)의 장비(裝備)이자 무기(武器)이다. ‘지팡이’(미쉬에네트)는 양들을 인도(引導)하기 위한 장비(裝備)이며, ‘막대기’(쉐베트)는 일종(一種)의 무기(武器)로서(삼하 23:21) 공격(攻擊)해 오는 맹수(猛獸)들을 방어(防禦)하는 도구(道具)이다.

 

(06월29일(수) <예상(豫想)치 못한 우회(迂廻)로 2: 원수(怨讐)의 목전(目前)>

 

(Q)~(시편23:5, 마 5:44, 롬 12:18~21) 인생여정(人生旅程)에서 살다보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원수(怨讐)”라고 할 만한 상대(相對)와 마주 하게 된다. 그럴 때 즉 “원수(怨讐)들에게 둘러싸일 때 그대는 원수(怨讐)를 어떻게 대합니까? 또한 성도(聖徒)로써<우리를 인도(引導)하고 계신 목자(牧者)를 믿는다면 삶에서 마주하는 원수(怨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A)~○. 죄인인 우리 인생들은 인생여정(人生旅程) 가운데 생각하지 못한 장애물(障碍物)과 보이는 원수(怨讐)와 보이지 않는 원수(怨讐)들에게 둘려 쌓여 살게 된다. 그러한 경험가운데에서 많은 경우 인간의 방법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境遇)나 또는 근심걱정으로 병(病)들거나 폐인(廢人)이 되는 경우(境遇)들이 많다, 그러나 (시편23:5절)에서 다윗의 경험(經驗)과 교훈(敎訓)을 나의 것 우리의 믿음으로 받아들여 선(善)한 목자(牧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우리에게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적용(適用)하자.

 

○. (시편23:5) 목자(牧者)와 양(羊)에 대한 묘사(描寫)에서 주인(主人)과 손님에 대한 묘사(描寫)로 바뀌고 있다. 다윗은 이 부분(部分)에서 현재(現在)보다 더욱 안전(安全)하고 평안(平安)하게 될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복된 미래(未來)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牧者)가 되신 결과(結果)로서 주어질 것이다. 한편 주인과 손님의 관계(關係)는 상호간(相互間)의 긴밀(緊密)한 결속(結束)과 언약적관계(言約的關係)를 뜻하므로 앞에서 언급(言及)된 목자와 양(羊)의 관계(關係)보다 발전(發展)된 의미를 함축(含蓄)하고 있다(Craigie).

 

○. 내 원수(怨讐)의 목전(目前)에서 내게 상(床)을 베푸시고. 

다윗의 주변(周邊)에는 그의 생명을 노리는 대적(對敵)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危機)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豊盛)한 대접(待接)을 받아온 것이다. 여기서 ‘베푸시고’란 미완료(未完了) 시재(詩才)로서 과거(過去)로 부터 지금까지의 계속적(繼續的)인 행동(行動)을 시사(示唆)하고 있다(Calvin). 그리고 ‘상(床)을 베푸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관계(言約關係)를 견고(堅固)히 하셨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구약적(舊約的)인 상황(狀況)에서 하나님 앞에서 베풀어진 음식(飮食)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交際) 및 언약관계(言約關係)의 발전(發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출 24:8-12, 고전 11:25). 이렇게 볼 때, 본 구절(句節)은 험난(險難)한 세상 중에서도 하나님은 목자와 같이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保護)하심으로 시종(始終) 하나님의 언약(言約)을 이행(移行)하셨음을 증거(證據)하고 있다. (시편 23장, 만나주석)

 

○. (시편23:5) 내 원수(怨讐)의. 하나님이 주인(主人)이기 때문에 해(害)를 가하고자 하는 원수(怨讐)들의 음모(陰謀)는 무산(霧散)될 수밖에 없다. (상(床)을 베푸시고). 

다윗은 지금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연회장(宴會場)에 있는 손님으로 소개(紹介)한다. 여호와는 목자 이상(以上)의 일을 한다. 그는 그의 손님들을 위해 자신의 식탁(食卓)에 음식(飮食)을 풍성(豊盛)히 차려내는 왕이다. 왕(王)의 아들의 혼인(婚姻)잔치에 관한 비유(譬喩)(마 22:1~14)와 비교(比較)하라. “상(床)을 베풀다”라는 구절(句節)은 식사(食事) 준비(準備)를 나타내는 관용적(慣用的) 표현(表現)이다(참조 잠 9:2).

 

(06월30일 (목) <확실(確實)한 약속(約束)> 

 

(Q)~(시편 23:6)에서 다윗이 확신(確信)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事實)은 무엇입니까? 

 

(A)~○. 비록 우리가 처(處)해 있는 골짜기가 아무리 깊고 우리의 원수(怨讐)가 아무리 집요(執拗)하게 공격(攻擊)해 올지라도, 하나님의 선(善)하심과 인자(仁慈)하심, 의 두 가지 사실을 다윗은 확신(確信)하였다. 우리의 인생여정(人生旅程)을 끝까지 이끄시는 예수님의 인도(引導)하심에는 의심(疑心)할 여지(餘地)가 없다. 죄인들의 구원자(救援者) 예수님께서 이러한 선(善)하심과 인자(仁慈)하심으로 갈바리 십자가(十字架)에서 고난(苦難)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 (시편23:6) <인자(仁慈)하심>

물질적(物質的), 영적(靈的) 복(福)들이 다윗의 온 생애(生涯)를 통하여 그를 따르는 것처럼 의인화(擬人化)되었다. 그는 이 말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의 현실적(現實的) 부침(浮沈)의 전반(全般)에 걸쳐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적(全的)인 신뢰(信賴)를 나타내며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이 같은 인도(引導)가 미래(未來)에도 계속(繼續)될 것임을 예상(豫想)한다.

 

○. <여호와의 집>

시인(詩人)은 자신이 계속(繼續) 하나님의 집에 손님으로 머물 것임을 확인(確認)하고 있다(참조 시 15:1; 27:4; 65:4; 84:4).

 

○. <영원(永遠)히>

문자적(文字的)으로 “날들의 길이까지.” 이는 곧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을 의미(意味)한다. 그러나 믿음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는 이생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交際)를 넘어 장차(將次) 올 세상에서의 영원(永遠)한 교제(交際)를 바라본다. 이 시(詩)는 다함없는 기쁨의 분위기(雰圍氣) 속에서 끝난다.” (시편 23장, 재림교주석)

 

○. (시편23:6) 나의 평생(平生)에 선(善)하심과 인자(仁慈)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다윗은 언약(言約)을 지키시고 풍성(豊盛)한 기업(基業)을 주신 하나님의 신실성(信實性)에 근거(根據)하여 앞으로 그의 남은 삶도 하나님 안에서 복될 것임을 확신(確信)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인자(仁慈)하심’에 해당(該當)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言約的) 사랑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 <여호와의 집에 영원(永遠)히 거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은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소(聖所)를 가리킨다. 하지만 본 구절(句節)에는 이보다 더 깊은 영적(靈的)인 의미(意味)가 추가(追加)로 담겨져 있다. 그 근거(根據)로 전치사(前置詞) ‘베’을 들 수 있다. 즉, 단순히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것만을 확신했다면 ‘베’대신에 방향(方向) 전치사 ‘엘’( … 으로)을 사용했을 것이나 그는 ‘ … 안에’라는 의미를 지닌 ‘베’를 사용한 것이다. 더욱이 이 말은 ‘영원히’ 라는 말과 어울려 다윗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交際)에 대한 확신(確信)을 표현(表現)해 주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句節)은 결코 문자 그대로 영원히 성소(聖所)에만 앉아 있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다윗이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영적교제(靈的交際)의 세계에 들어가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다(Lange, Rawlinson). (시편 23장, 만나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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