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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제2기 제8과 약속(約束) -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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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5-16 02:10 조회1,4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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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과 약속(約束)    

                                               (05월21일 (안) / 일몰: 19시39분)


(05월15일 (日) <모리아 산(山)>


(Q)~(창세기 22:1~12)와 (히브리서 11:17)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특별(特別)한 방법(方法)으로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치라고 하신 시험(試驗)의 목적(目的)은 무엇이며, 이 사건(事件)을 통(通)해 어떠한 영적교훈(靈的敎訓)을 얻을 수 있나요?


(A)~○.<시험(試驗)하시려고>

   성경(聖經)에 나타난 시험(試驗)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탄에게서 기원(起源)한 시험(試驗)으로(엡 2:2) 인간을 타락(墮落)케 하는 유혹(temptation)이다(3:1-6).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試驗)으로 성도의 신앙을 증험(證驗)해 보는 테스트(test)이다(욥 23:10). 

여기서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후자의 경우로 그를 믿음의 조상(祖上)으로 연단(鍊鍛)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적(人間的)인 생각을 완전(完全)히 굴복(屈伏)시켜야 하는 순종의 시험이었다.


○.<모리아와 갈보리>

브엘세바에서 사흘길 떨어진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 시대  이후로부터 다윗과 솔로몬 등으로 이어지며 계속되어온 이스라엘 민족의 주요  예배처소였다(삼하 24:18-25; 대하 3:1). 그런데 이곳에서 일어난 '여호와 이레' 사건은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즉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본문의 모리아 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 희생을 예표하는 사건으로서 구속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 두 사건(事件)의 공통점(共通點)을 살펴보면   대속제물(代贖祭物)을 통한 희생제사(犧牲祭祀)였다>

즉 이삭 대신(代身)에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準備)해두신 양(羊)을 제물(祭物)로 삼는 것처럼((창22:13절), 우리들을  대신(代身)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羊) 예수께서 희생제물(犧牲祭物)이 되셨다(사 53:7; 벧전 1:19).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獨子) 이삭>

3중으로 강조(强調)된 점층법적(漸層法的) 표현(表現)이다. 즉 

 (1)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 중에서도 가장 고귀(高貴)한 사람 

 (2) 그중에서도 100세에 낳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자 

 (3) 이스마엘이 떠난 후 자신에게 남은 유일(唯一)한 혈통(血統)이며 25년을 기다려 얻은 ‘언약(言約)의 아들’이란 점을 강조(强調)한 말이다. 

이 말에는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정(愛情)을 최고도(最高度)로 불러 일으켜 절박(切迫)한 상황(狀況)을 만들어 놓은 후 그러한 상황하(狀況下)에서도 자신의 명령(命令)에 순종(順從)토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鍊鍛)의 의미(意味)가 담겨있다.


○.<아브라함의 시험(試驗)은 우주(宇宙)의 교과서(敎科書)>

  아브라함에게 요구(要求)된 희생(犧牲)은 다만 그의 유익(有益)만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한 후대(後代)의 이익(利益)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다른 세계들의 무죄(無罪)한 지적존재(知的存在)들도 교훈(敎訓)하시기 위(爲)함이었다. 그리스도와 사단의 대쟁투(大爭鬪)의 전장(戰場) 곧 구속(救贖)의 경륜(經綸)이 이루어지는 장소(場所)는 우주(宇宙)의 교과서(敎科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約束)에 대한 신앙(信仰)이 부족(不足)함을 보였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과 천사(天使)들 앞에서 그가 언약(言約)의 조건(條件)을 따르지 못하였다고 비난(非難)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을 자격(資格)이 없다고 그를 고소(告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온 하늘 앞에서 하나님의 종의 충성(忠誠)을 시험(試驗)하여 완전(完全)한 순종(順從)만이 받으시는바 된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구속(救贖)의 경륜(經綸)을 더 완전하게 저들 앞에 밝히고자 하셨다.


○.<천사(天使)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삭의 순종(順從)이 시험(試驗)당하던 광경(光景)을 목격(目擊)하였다>

이 시험(試驗)은 아담이 당한 것보다 훨씬 더 냉혹(冷酷)한 것이었다. 우리의 첫 조상(祖上)에게 주어진 금령(禁令)을 따르는 데는 고통(苦痛)이 포함(包含)되지 않았으나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命令)에는 가장 고통(苦痛)스러운 희생(犧牲)이 요구(要求)되었다. 온 하늘은 아브라함의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순종을 경이(驚異)와 감탄(感歎)으로 지켜보았다. 온 하늘은 그의 충성(忠誠)을 칭찬(稱讚)하였다. 사단의 고소(告訴)가 거짓됨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獨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사단의 비난(非難)에도 불구하고) 네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줄을 아노라”고 선언(宣言)하셨다. 다른 세계의 지성(知性)들 앞에서 아브라함에게 맹세(盟勢)로 굳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言約)에 대한 순종(順從)은 보상(報償)을 받으리라고 증거(證據)하였다.(부조 154, 155).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試驗)하셨다>

그러나 사탄처럼 그를 죄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犧牲祭物).로 바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브라함의 범죄(犯罪)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命令)이 그를 옳다고 인정(認定)해 주실 것이고, 그를 변호(辯護)해 주셨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은총(恩寵)을 감사하는 생활(生活)에 얼마나 가득차 있는가를 발견(發見)함으로써 "칭찬(稱讚)과 영광(榮光)과 존귀(尊貴)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벧전 1:7).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욥도 시험(試驗)하셨다. 그리하여 욥은 하나의 선(善)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위대(偉大)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試驗)하셨다" 는 말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들어 올리셨다" 고 읽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학자(學者)가 학업(學業)에 정진(精進)해서 보다 높은 경지(境地)에 이르면 그가 드리워 올려지는 것과 같다. 굳센 믿음도 때로는 어려운 시련(試鍊)과 고통(苦痛)스런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理由)도 설명(說明)하지 않으셨다>

 이스마엘을 쫓아 낼 때는 아브라함이 만족(滿足)할만 한 정당(正當)한 이유(理由)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이삭이 죽어야 하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 까닭과 무엇을 위해서 그래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삭이 진리(眞理)를 위한 순교자(殉敎者)의 죽음을 죽는다든지, 보다 귀한 다른 생명을 속량(贖良)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이라든지 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혹은 이삭이 우상숭배자(偶像崇拜者)나(신 13:8, 9), 패역(悖逆)한 아들(신 21:18, 019)의 경우(境遇)와 같이, 하나님이나 부모(父母)를 거역(拒逆)한 죄인(罪人)으로서 죽는다면, 그의 죽음을 정의(定義)를 위한 희생(犧牲)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삭은 공순(恭順)하고 순종(順從)하며 소망(所望)스러운 아들인 것이다. "여호와여 그의 피 흘림이 어떤 유익(有益)을 가져올 것입니까?"


○.길고 파란 많은 생애 중 최고의 시험에 대해 아브라함은 단 한마디의 의문을 제기하지도, 단 한 번의 반대를 표하지도, 인간의 조언을 구하지도 않고 순종했다. 원칙이 연루된 곳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의무에 대한 분명한 인식 외에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의 협력은 사랑과 헌신이 넘치는 심령으로부터 솟아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살며, 진리와 의무에 대한 그의 이해를 흐리게 만드는 일체의 인간적인 계산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하나님의 친구”의 심령 속에 어떤 투쟁이 일어났겠는가? 그것은 그가 순종해야 되는지에 대한 투쟁이라기보다는, 그의 감각과 이성이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있다는 하나님의 보증을 얻기 위한 투쟁이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만큼 너무 귀한 것은 없음>

이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숨 막힐 듯하고, 살을 에는 듯할지라도 그분을 믿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큰 교훈을 가리치고 있다. 그것은 또 하나님과 부모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우리들이 배우는 또 하나의 교훈은 “이것은 너무 귀한 것이어서 하나님께 바칠 수가 없다”고 할 만한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사인즈 1887. 1. 27).


<요약(要約)>

○.이삭을 바치는 이 아브라함의 복종(服從)은 다음과 같은 사실(事實)의 생생한 표현이다.

(1)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獨生子)를 하나의 희생제물(犧牲祭物)로 내어주어, 고통(苦痛)을 받게 하고 죽게 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상(傷)함을 받는 것이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이다(사 53:10; 슥 13:7 을 참조). 아브라함은 의무감(義務感)과 감사(感謝)함 때문에 이삭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는 이삭을 자기의 한 친구(親舊)에게 내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독생자(獨生子)를 내놓을 어떤 의무(義務)도 없으시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적(敵)이었던 까닭이다.


(2) 이것은 또한 받은 사랑에 보답(報答)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의무(義務)를 밟고 따라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도록 명령(命令)하신다. 비록 오른 팔이나 오른 눈, 또는 이삭까지도, 그것이 죄라면 우리는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을 다스리셔야 할 주인(主人)이신 그리스도와 경쟁(競爭)이 되거나, 상대(相對)가 되는 것은 모두 떠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눅 14:26). 그리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의 목소리이신 섭리(攝理)를 통하여 이삭과 헤어지도록 명령하시는 때가 종종 있다. 그 때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거룩한 뜻을 받아들이고 복종(服從)하지 않으면 안 된다(삼상 3:18). (창 22:1~12, 매튜헨리)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자격(資格)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며 그분의 은혜(恩惠)를 받아들이며 그분의 명령(命令)에 전적(全的)으로 순종(順從)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05월16일 (月) <하나님께서 친(親)히 준비(準備)하시리라>


(Q)~(창세기 22:8~19)에 “하나님께서 친(親)히 준비(準備)하시리라”는 약속(約束)을 아브라함의 말은 어떻게 성취(成就)되었으며 그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


(A)~○.<이삭, 그리스도의 상징(象徵)>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될 자기 아들을 예표하기 위하여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그 일을 계획하셨다. 이삭은 세상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로 바쳐질 하나님의 아들의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깊이 깨닫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 진리를 생생한 현실로 보여주기 위하여, 또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이삭을 죽여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그 어둡고 두려운 시련의 시간에 아브라함이 견딘 모든 고뇌는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을 위한 구속의 경륜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청년 지도자 1900. 3. 1).(창 22:1~12, E.G주석)


○.<여호와의 산(山)에서 준비(準備)되리라>

문자적(文字的)인 뜻은 ‘여호와의 산(山)에서 보게 되리라’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獻身)하였던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마련해 둔 숫양을 보게 되는 축복을 얻었듯이 성도(聖徒)의 구원(救援)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豫備)해 두신 구원계획(救援計劃)에 우리가 믿고 순종(順從)할 때 비로소 온전히 주어지는 것임을 시사(示唆)해 준다(요 1:10-12).


○.<아들을 대신(代身)하여>

이삭을 대신(代身)하여 죽은 한 숫양 뿐 아니라 역사(歷史) 이래 인간의 죄를 대신(代身)하여 수없이 죽어간 흠없는 짐승들(출 12:5, 29:1, 레 1:3, 민 6:14)은 오로지 흠(欠)없는 한 어린 양의 영원(永遠)한 제사(祭祀), 즉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예시(豫示)한다(히 9:11-14, 13:11, 12).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뜻으로 (창22:8절)에 (여호와의 산(山)에서 준비(準備)되리라)

문자적(文字的)인 뜻은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獻身)하였던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마련해 둔 숫양을 보게 되는 축복(祝福)을 얻었듯이 사랑의 하나님의 구원계획(救援計劃)을 우리가 믿고 순종(順從)할 때 비로소 온전히 주어지는 것임을 시사(示唆)해 준다(요 1:10-12).


○.<하나님이 준비(準備)하신 예수님>

여기서 하나님이 준비(準備)하신 번제(燔祭)할 어린 양(羊)은 예수님을 의미(意味)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準備)하리라는 말씀은 양(羊)은 여호와를 통(通)하여 준비(準備)되리 라로 번역(飜譯)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죄(罪)를 대신(代身)하여 번제(燔祭)할 어린 양으로 준비(準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번제(燔祭)할 어린 양(羊)으로 장차(將次) 인류(人類)를 위(爲)해 목숨을 바쳐 희생(犧牲)하실 예수님의 사역(使役)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05월17일 (火) <사라의 죽음>


(Q)~(창세기23:1~20) 사라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A)~○.<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성경상에서 여자로서는 나이가 언급(言及)된 유일(唯一)한 경우이다. 

그 이유는 사라가 ‘약속의 자녀’의 어머니(창17:19)로서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히 11:11, 12).


○.<사라가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기럇아르바’는 ‘아르바의 성읍’이라는 뜻으로 헤브론의 옛 이름이다(수 14:15, 15:13, 21:11). 이곳은 애굽의 소안보다 7년 먼저 세워진 역사 깊은 도시일 뿐 아니라(민 13:22) 고대 사회의 문화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편 이곳은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진 후 그랄(20:1)과 브엘세바(21:31-34)에 거하기에 앞서 약 20년을 살았던 곳인데(13:18) 사라가 이곳에서 죽었다는 것은 곧 전장(창22장)의 사건 이후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다시 이곳으로 이주하였음을 의미한다. 훗날 아브라함이 죽어 장사(葬事)된 곳도 이곳이다(25:7-10).


○.아브라함과 사라는 오랫동안 안락하게 함께 살아왔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떼어놓을 수 없는 그들 사이를 죽음이 떼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친구들이나 사랑을 입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죽음의 습격(襲擊)에서 면제(免除)될 수는 없다. 사라는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 그 곳에서 그는 60년 이상이나 체류(滯留)했었다.


○.사라가 처음으로 묻힌 이래 이곳에는 아브라함(25:9)과 이삭, 리브가, 야곱과 레아(49:31, 50:13) 등의 3대 족장(族長)과 그의 아내들이 묻혔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요셉은 야곱이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세겜 땅에 장사(葬事)되었다(수 24:32). (창 23:1~20, 만나주석)


○.<그녀의 죽음에 대한 아브라함의 비통(悲痛)한 슬픔>

그는 사라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한 사람이었다 함은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니며 애곡(哀哭)하는 그 당시의 풍속에 따라 애도(哀悼)하는 의식(儀式)만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일생을 함께 한 착한 아내의 잃음을 참으로 비통해 하였고, 자기가 아내에게 지니고 있던 애정(愛情)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끝까지 보여 주었다. 두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즉 아브라함은 사라로 인하여 "슬퍼하며" 또 "애통하였다" 고 했다. 그의 슬픔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것이었다. 그는 아내의 주검이 있는 장막(帳幕)에 와서, 그 시체(屍體) 옆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의 깊은 마음을 다 적시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난 사라를 추모(追慕)하며 보다 깊은 존경(尊敬)의 염(殮)을 표하기 위하여서였으리라. 


우리들의 가까운 친척(親戚)의 죽음을 애통(哀痛)하는 것은 법도(法道)에 맞는 일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은 그러한 애통과 슬픔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순응(順應)이요, 존경을 받아야 마땅할 고인들에게 존경의 태도(態度)를 표하는 것이다. 눈물은 세상을 떠난 우리 친구들에게 합당(合當)한 조사(助詞)이다. 몸이라는 씨가 뿌려 진 후(사람이 죽으면)에는, 거기에 물(눈물)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절망(絶望) 속에서 통곡(痛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은총(恩寵)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와 헤어진 죽은 사람들이나 남아 있는 우리들 모두에 대한 선(善)한 희망(希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의 장례(葬禮) (창세기 23:16-20)>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에브론 사이에 있던 장지(葬地)에 대한 상담(商談)의 결과(結果)를 읽어볼 수 있다. 그 계약(契約)은 모든 이웃들 앞에서 공개적(公開的)으로 이루어졌다. "헷 족속이 듣는 데서, 헷 족속 앞에서" 라고 했다(16, 17절). 정의(定義)와 마찬가지로는 분별심(分別心)도, 우리가 거래(去來)를 할 때에는 공정(公正)하고 개방적(開放的)이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할 것을 교훈(敎訓)해 줌을 잊지 말자. 부정(不正)한 계획(計劃)은 빛을 싫어한다. 그리고 남모르게 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직(正直)하게 계약(契約)하려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누가 증인(證人)이 되든 상관(相關)하지 않는다. 우리의 법률(法律)도 공개시장(公開市場)에서 등록(登錄)된 합법적(合法的)인 행위(行爲)에 의해서 이루어진 매매(賣買)만을 보장(保障)하고 보호(保護)해 주고 있다.  (창 23:1~20, 매튜헨리)


○.<막벨라 굴(窟)>

‘막벨라’는 ‘이중(二重)의’(double)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팔’에서 파생(派生)된 말로 ‘이중(二重)으로 된 굴(窟)’이란 뜻이다. 아마 이는 

(1) 입구(入口)가 두 개인(個人) 굴(窟)을 가리키거나 

(2) 굴(窟) 속에 또 하나의 굴(窟)이 있는 겹굴 

(3) 아니면 두 사람이 함께 장사(葬事)될 수 있는 큰 굴(窟)을 말할 것이다. 

여하튼 특이(特異)한 형태(形態)를 지칭(指稱)하던 이 말은 은연중(隱然中)에 장소(場所)를 가리키는 고유명사(固有名詞)로 굳어지고 만 것 같다.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엄밀(嚴密)히 말하면 마므레는 헤브론 지경내(地境內)의 한 지역(地域)이다(13:18). 그리고 ‘마므레’란 지명(地名)은 그곳을 점령(占領)한 아모리 종족(種族)의 한 부족장(部族長) 이름으로부터 유래(由來)한 것이다(14:13).


○.<아브라함이 매장(埋葬)할 소유지(所有地)로 확정(確定)되었더라>

마므레의 매장지(埋葬地)가 아브라함의 소유(所有)로 등기(登記) 이전(移轉)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確認)시켜 주기 위해 재언급(再言及)되었다. 한편 가나안의 상속자(相續者) 아브라함(13:15, 17)이 가나안에서 실제적(實際的)으로 소유(所有)한 유일(唯一)한 땅이 의미심장(意味深長)하게도 자신의 최후안식처(最後安息處)가 될(25:9) 한 조각 장지(葬地)였다는 사실(事實)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約束)받은 가나안이 진정(眞正) 무엇을 의미(意味)하는 것이었는지를 시사(示唆)해 준다. 그것은 곧 그의 궁극적(窮極的)인 기업(基業)이 죽음과 함께 유업(遺業)으로 받을 하늘 가나안, 즉 천국(天國)인 것이다.  (창 23:1~20, 만나주석)


○.<사라의 죽음과 장례(葬禮)는(창23장), 미래(未來)에 있을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결혼(結婚)을 예상(豫想)하게 하며.(창25:1~4), 사라는 아브라함의 가족(家族)들 가운데 죽어서 약속(約束)의 땅에 장사(葬事)된 첫 번째 사람으로 사라의 죽음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約束)이 이루어 졌음을 보여주며 이 땅은 나그네 길이요 사라질 땅이니 영원(永遠)한 하늘나라에 소망(所望)을 두고 살라는 교훈(敎訓)을 주고 있다.

 

(05월18일 (水) <이삭을 위(爲)한 아내>


(Q)~(창세기 24:1~9) 아브라함은 늙은 종을 통(通)하여 이들 이삭의 결혼(結婚)에 어떤 조건(條件)을 부탁(付託) 하였으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役事) 하시고 인도(引導) 하셨으며 영적(靈的)인 의미(意味)는 무엇이었는가?


(A)~○.<가나안 족속(族屬)의 딸 중에서 … 택(擇)하지 말고> 이삭을 자기 혈통(血統)과 결혼(結婚)시켜 순수성(純粹性)을 보존(保存)할 뿐 아니라 가나안 족속(族屬)의 방종(放縱)한 생활(生活)에 물들지 않도록 구별(區別)하기 위(爲)함이다. 즉 가나안 족속(族屬)의 도덕적(道德的) 문란(紊亂)을 익히 알고 있던 아브라함(창18:16-33, 19:27, 28)은 이삭이 그들의 딸과 결혼(結婚)함으로 말미암아 악(惡)에 물들 가능성(可能性)을 사전(事前)에 차단(遮斷)하려 하였던 것이다. 한편 훗날 모세의 율법(律法)에서도 이스라엘 백성(百姓)이 우상숭배(偶像崇拜) 행위(行爲)에 탐닉(耽溺)해 있는 가나안인과 혼인(婚姻)하는 것을 엄격(嚴格)히 금지(禁止)하고 있는데(출 34:16, 신 7:3) 이는 믿는 자와 함께 멍에를 같이 함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임을 알 수 있다(고후 6:14).


○.그의 아들 이삭이 가나안 사람의 딸과 결혼(結婚)해서는 안 되고, 그의 친척(親戚) 중의 하나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이 타락(墮落)한 것을 보았고, 계시(啓示)를 통하여, 그들이 멸망(滅亡)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 가나안 사람들의 영혼(靈魂)에 덫이 되거나, 혹은 그의 이름에 오점(汚點)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 그들 중의 어떤 여인(女人)과 결혼하는 것을 원(願)하지 않은 것이다.


○.그 종은 이삭의 아내를 아브라함의 친척(親戚) 중에서 택(擇)해 오기 위해 자기의 최선(最先)을 다할 것을 맹세(盟勢)로 약속(約束)해야만 하였다(창24:2-4절). 아브라함이 그 종으로 하여금 맹세(盟勢)를 하도록 한 것은, 그래야만 자가가 안심(安心)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종이 이 일에 최대(最大)의 조심성(操心性)과 성실(誠實)을 다해 줄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그의 종들로 하여금 그들의 할 일에 대하여 맹세할 것을 요청(要請)하신다. 


○.이삭의 결혼(結婚)을 계획(計劃)하는 일이 오랫동안 지체(遲滯)된 것은 아마도 이삭의 아내로 가나안 여인(女人)을 취(取)하는 것을 피(避)하려는 아브라함의 소망(所望)과 그때까지 하란에서 아내를 구(求)하는 것이 용이(容易)하지 않았다는 사실(事實) 때문일 것이다(참조 창24:3~6절).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아마도 이 문제에 절박감(切迫感)이 더해졌을 것이다.


○.가나안 족속(族屬)의 증가(增加)하는 방탕(放蕩)과 우상숭배(偶像崇拜) 그리고 그들의 임박(臨迫)한 멸망(滅亡)을 인식(認識)한 아브라함은 약속(約束)된 씨의 순결성(純潔性)을 보존(保存)하기를 원(願)했다. 그는 하갈과 자신(自身)의 경험(經驗)과 그리고 롯과 이스마엘과의 경험(經驗)을 통해 이방인(異邦人) 배경(背景)을 지닌 사람들과 결연(結緣)하는 것의 위험성(危險性)을 배웠다(부조와 선지자, 174). 그런데다가 하나님이 이미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通婚)을 금지(禁止)하였고, 이 금령(禁令)은 후에 모세의 법(法)에 통합(統合)되었다. (출 34:16; 신 7:3).


○.<내 고향(故鄕) 내 족속(族屬)에게로 가서>

즉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으로 가는 것인데, 두 곳 모두 메소보다미아 지방(地方)에 있었다. 거기에 있는 아브라함의 친족(親族)들도 우상숭배(偶像崇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참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程度)의 지식(知識)과 경배(敬拜)를 보존(保存)하고 있었다(참조 창 31:19; 수 24:2; 부조와 선지자, 171).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것이 타락(墮落)한 가나안 족속 중에서 고르는 것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게 보였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이삭이 메소보다미아에 돌아가려고 한다면 허락(許諾)하지 말라고 엄숙(嚴肅)하게 명령(命令)했다. 아브라함은 그나 그의 아들이 마음대로 돌아가거나 심지어(甚至於) 잠깐 동안 체류(滯留)해서도 안 된다고 느꼈다. 그가 고령(高齡)인 것(창24:1절)과 함께 이것은 아마도 그가 아들의 아내를 구(求)하러 몸소 거기에 돌아가지 않도록 영향(影響)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그 사자(使者)를 네 앞서 보내 실지라>

하나님의 인도(引導)하심에 대한 확신(確信)을 자상(仔詳)하게 표현(表現)함으로써, 아브라함은 그와 아들의 일이 하나님의 지도(指導)와 보호(保護)아래 있다는 변(變)함없는 확신(確信)을 나타낸다. 엘리에셀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지도(指導)하심에 대한 동일(同一)한 보증(保證)이 훗날의 이스라엘 민족(출 23:20)과 그리스도 교회(히 1:14)에도 약속(約束)되었다.  (창 24:1~7, 재림교주석)


○.<부모(父母)들은 자녀(子女)들의 장래(將來)의 행복(幸福)에 대한 저희 책임(責任)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삭이 그의 아버지의 판단(判斷)을 존중(尊重)한 것은 그가 순종(順從)의 생활을 사랑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훈련(訓練)을 받은 결과(結果)였다. 아브라함은 자녀들에게 부모의 권위(權威)를 존중(尊重)하도록 요구(要求)하였으나 생활을 통하여 그 권위(權威)가 이기적(利己的)이거나 독재적(獨裁的)인 지배(支配)가 아니라 사랑에 기초(基礎)되고 저들의 복지(福祉)와 행복(幸福)을 고려(考慮)한 것임을 증명(證明)하였다. 진리(眞理)와 순결(純潔)과 선행(善行)에 대한 사랑을 일찍부터 영혼(靈魂)속에 심어라. 그리하면 젊은이들은 이와 같은 특성(特性)들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社會)를 구(求)할 것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품성(稟性)과 가정생활(家庭生活)에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선행(善行)의 모범(模範)을 보이고자 노력(努力)해야 한다. 가정에 햇빛이 넘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토지(土地)나 돈보다 훨씬 가치(價値)있을 것이다. 가정(家庭)에 대한 사랑이 저희 마음에 생생하게 간직되어 저들로 하여금 저희 유년시기(幼年時期)의 가정(家庭)을 하늘 다음 가는 평화(平和)와 행복의 장소(場所)로 돌아보게 해야 한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동일(同一)한 성품(性稟)의 특성(特性)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때때로 인내(忍耐)와 관용(寬容)을 베풀 기회(機會)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수양(修養)을 통하여 모두가 가장 친밀(親密)한 연합(聯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저희들이 꾸밀 가정(家庭)을 위하여 자신들을 준비(準備)해야 한다. 스스로 부모의 가정에서 충실(忠實)히 의무(義務)를 감당(堪當)함으로 저들로 하여금 가정에서 극기(克己)를 실행(實行)하고 친절(親切)과 예의(禮義)와 그리스도인적 동정(同情)을 나타내게 하라. 그리하면 사랑이 마음속에 따뜻하게 간직될 것이며, 이와 같은 가정에서 나가서 자기 자신의 가족(家族)의 가장(家長)으로 서는 사람은 평생(平生)의 반려자(伴侶者)로 선택(選擇)한 여자의 행복을 증진(增進)시키는 방법(方法)을 알 것이다. 결혼(結婚)은 사랑의 종말(終末)이 되는 대신에 사랑의 시작(始作)이 될 것이다(부조 175,176). (창 24:1~7, E.G주석)

 

○.이삭의 아내를 찾는 모든 과정(過程)에서 하나님께서는 매(每) 걸음마다 선택(選擇)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존중(尊重)해 주셨으며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이삭의 결혼을 직접적(直接的)으로 섭리(攝理)해 주시리라는 확신(確信)을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每日)의 걸음마다 하나님의 인도(引導)하심을 구(求)하며 그 인도(引導)하심에 감사(感謝)와 순종(順從)으로 반응(反應)해야 할 것이다.

  

(05월19일 (木) <아브라함을 위(爲)한 아내>


(Q)~(창세기 25:1~11) 아브라함의 인생(人生) 마지막에 있었던 사건(事件)들의 의미(意味)는 무엇이며 아브라함의 아내들과 후예(後裔)들로 인(因)한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나홀로 계보(系譜)(창세기22:20-24)>

   성경에 언급(言及)된 족보(族譜)이야기는 단지(但只) 과거(過去) 인물(人物)들의 지루한 이름 나열(羅列)이 아니라, 구속(救贖) 역사(歷史)의 주역(主役)이 과연(果然) 누구인가를 밝혀 주고 그 주역(主役)의 뿌리 깊은 역사성(歷史性)(사실성(事實性))을  제공(提供)하는 복합적 기능(複合的機能)을 가진 축소판(縮小版) 역사기록(歷史記錄)이다.<창세기 5:1-5성경의 족보(族譜)들 참조>. 이런 관점(觀點)에서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후(後) 잊혀져간 그의 형제(兄弟) 나흘의 갑작스런 가문소개(家門紹介)는 나름대로 중요(重要)한 의미(意味)를 지니다. 즉 나흘의 가문(家門)은 아브라함 가문(家門)과의 근친결혼(近親結婚)으로 아브라함 사후(死後), 하나님과의 언약(言約)을 계속(繼續) 이어나갈 이삭과 야곱 등의 언약적혈통(言約的血統)과 연관(聯關)을 지닌다. 그런면에서 나흘의 가문(家門)가운데 리브가와 라반을 낳았던 브두엘은 이 계보(系譜)의 중추적(中樞的) 인물(人物)이 될 수 밖에 없다(24:15,29). 왜냐하면 리브가는 후(後)에  이삭의 아내가 되고, 라반은 야곱의 아내가 된 두 딸(레아와 라헬)을 낳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人間)의 삶과 역사(歷史)를 주관(主管)하시며 특히 

거룩한  씨앗을 예비(豫備)하시며 보전(保全)해 두신다.


○.아브라함이 ‘그두라’(이름의 뜻은 ‘향기(香氣)’)에게 얻은 여섯 아들들의 이름은 아람 종족(種族)들의 명칭(名稱)과 일치(一致)된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러 민족(民族)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부분적(部分的)으로 성취(成就)된 것이다(창17:4). 아브라함이 생식불능(生殖不能)의 나이(137세)에도 생산력(生産力)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恩寵)의 언약이 자연(自然)의 한계(限界)를 능가(凌駕)함을 증명(證明)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속(救贖) 목적(目的)이 담긴 혈통관계(血統關係)를 잊지 않고 자신의 합법적(合法的) 상속자(相續者)이자 언약(言約)의 후손(後孫)인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所有)를 물려주었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의 약속(約束)과 언약의 상속권(相續權)까지도 물려주었다.


○.사라가 죽은 다음에 아브라함이 결혼(結婚)한 다른 한 아내 ‘그두라’에게서 태어난 자식(子息)들에 관한 기록(記錄)이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애(生涯)의 가장 귀한 동반자(同伴者)였던 사라를 장사(葬事)지내고, 이삭을 결혼시킨 다음 극(極)히 외로웠다. 그는 자기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의 가족(家族)에는 주부(主婦)가 필요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홀로 지내는 것은 좋지 아니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두라’와 결혼(結婚)을 한 것이다. 아마 그녀는 아브라함의 수석 여종이었을 것이며,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돈을 주고 사온 여종 이였을 것이다. 결혼이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라고 금지(禁止)된 것은 아니다. ‘그두라’에게서 아브라함은 여섯 아들을 낳았다. 그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크게 번성(蕃盛)하리라는 약속(約束)이 부분적(部分的)으로 성취(成就)된 것이다. 아마 아브라함은 다시 결혼을 할 때 이 사실을 염두(念頭)에 둔 것 같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받은 정력(精力)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約束)의 혜택(惠澤)이 자연적(自然的)인 힘의 한계(限界)를 능가(凌駕)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것이다.


○.<아브라함의 나이와 죽음의 기록(記錄)이 있다(창25:7~8절)>

 그는 175년간(年間)을 살았다. 그것은 그가 가나안에 온지 꼭 100년 후(後)였다. 그는 그처럼 오랫동안 객지(客地)에서 한 체류자(滯留者)로 지냈다. 비록 그는 오랫동안 훌륭한 삶을 살았고, 또한 선(善)한 일을 행(行)하고 앓지도 않고 지냈지만, 결국(結局)에는 죽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後妻)로

①. ‘그두라’를 취(取)하여 자녀6명을 낳았고(창25:1~4)

②.‘하갈’의 아들의 계보(系譜)(창25:12~18)에 자녀들의 목록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참고로>

아브라함의 가계(家系)를 보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 게달, 앗브엘, 밉삼, 미스마, 두마, 맛사, 하닷, 데마, 여둘, 나비스, 게드마 (창 25:13~15) 12명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낳고

이삭은 리브가를 취(取)하여 

아들 에서와 야곱으로 이어지며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후에 ‘그두라’와 다시 결혼하였으며, 아브라함은 175(백칠십오)세(歲)를 살고 죽었으며 그의 삶은 위대(偉大)한 믿음의 모본(模本)으로 남게 되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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