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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약속 (질문, 대답, 설명) 5/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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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5-14 00:49 조회3,1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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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약속
(5월 2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39분)
 
연구 범위: 창 22, 히 11:17, 레 18:21, 요 1:1~3, 롬 5:6~8, 창 23~25, 롬 4:1~12
 
기억절: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창 24:1).
 
아브라함이 “노년”이(창 21:2) 되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사라가 아들을 낳았고, 아브라함은 그 아기를 이삭(참조, 창 21:1~5)이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으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에서 마침내 절정에 도달한다. 모리아 산에서는 이삭이 아닌 숫양을 제물로 바치게 되는데(창 22:13), 그것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천하 만민을 축복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창 22:17, 18). 그 후손은 물론 예수님이셨다(행 13:23). 그러므로, 이 믿기 힘든 이야기를(어떤 면에서 불편하기까지 한) 통해 구원의 계획이 좀 더 드러나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 어떤 깊은 영적 교훈이 있었든지 간에, 아브라함의 가족은 이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미래는 확실하지 않았다. 사라는 모리아 산에서의 제사 이후에 죽게 되고(창 23장), 이삭은 미혼으로 남아 있었다.
아브라함은 직접 나서서 이삭에게 올바른 미래가 이어지도록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하도록 모든 것을 준비했고(창 24장), 리브가는 결혼 후 두 아들을 낳았다(창 25:21~23). 또한,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후처로 맞이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다(창 25:1~6). 이번 주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창 25:7~11).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당신의 약속들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살펴본다.
느끼기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약속을 끝까지 성취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격한다.
행하기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여정을 담대히 걸어 간다.
 
TMI 위로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창 22:1~12)
※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고 구원 계획의 전모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아브라함의 말은 어떻게 성취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창 22:8~14)
※ 수풀에 걸린 숫양과 실제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봉사로 성취되었다.
4. 사라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창 23:1~20)
※ 가나안 땅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땅이라고 인치는 일을 했다.
5.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아들의 짝을 찾는 일에 관하여 어떤 부탁을 했습니까?(창 24:1~9)
※ 동족에게 가서 구하라 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다.
6. 아브라함의 인생 마지막에 있었던 사건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창 25:1~11)
※ 인생 만년의 위로와 약속의 아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영원한 본향에 관한 믿음을 나타내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불확실성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통해 그 시험에 통과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숫양을 통해 앞으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주어질 예수님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5월 15일(일) 모리아 산
 
창세기 22:1~12과 히브리서 11:17을 읽어 보라. 이 시험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 어떤 영적 교훈을 얻게 되는가?
[창22:1~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답: 아브라함의 진정한 사랑이 누구에게 있는지 스스로 알게 하여 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하시는 것과, 사람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창세기 22장은 세계 문학의 고전이 되었으며,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런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한 후대의 성경 기록과도 조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레 18:21), 이삭을 통해 영원한 언약을 성취하시리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과도 반대되는 것처럼 보였다(창 15:5).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성경에 나타난 “시험”(nissah)은 두 가지 다른 개념을 포함한다. 먼저, 시험은 심판의 개념을 나타내는데, 이는 시험을 받는 자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며(신 8:2, 비교, 창 22:12), 동시에 시험받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출 20:18~20).
이 경우,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자손)를 잃게 될 위험을 무릅쓰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상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거나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는 우리의 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행위의 역할이 있다(롬 12:1).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자격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리는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확인된다. 아브라함의 모든 행위와 그의 열성적인 활동들, 그가 아들과 함께 했던 가슴 아픈 여정,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귀한 것마저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모습조차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 왜 그런가? 계획되어 있던 제사에 쓰일 숫양을 마련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닌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 양은 그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소망 되시는 예수님을 가리켰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 후로 은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행한 우리의 행위들 때문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결과이다(엡 3:8, 비교 롬 11:33).
 
<묵상>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경험한 일은 그대의 믿음과 그 믿음을 어떻게 나타내 보여야 할지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답: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부가설명> 사탄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말이 있다. ‘구원받으려면 네가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마련해놓지만 그것을 얻으려면 네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주장하고 아브람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이루려고 한 그 방법을 시도하라고 한다.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이 이 올무에 걸려 끌려가고 있다. 개신교인보다 재림교인이 더 그렇다. 그것은 천주교가 가르치는 대표적인 교리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책에 이 내용을 아주 그럴듯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과 의는 하나님의 창조라고 계시하였다(사45:8). 구원에 자기 노력을 더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자기도 참여하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루시퍼가 하려고 한 것이다. 루시퍼는 진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아브람을 속인 것처럼, 아주 그럴듯하게 속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의식에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을 이런 사상을 완전히 없애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2절에 ‘네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그의 사랑이 어디 있는지 스스로 알게 하신 것이다. 이삭이 그의 후손을 번성하게 할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지 보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후에 12절에 ‘독자’라는 말 앞에 ‘사랑하는’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독자’라고만 하셨다. 사람을 번성하게 하는 것이나 구원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을 인정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도 아브라함이 이런 엄청난 시험을 통하여 배운 것을 기록을 읽고 배운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교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자격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은혜를 받아 들이며 그분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5월 16일(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8, 14, 18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 무엇이 제공되었는가?
[창22:8,14,1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답: 수풀에 걸린 숫양을 대신하여 드리도록 준비해주셨고, 예수님을 보내서 구원을 이루셨다.
 
이삭이 희생 제물에 관하여 질문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사뭇 놀라운 말을 한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그런데 히브리어 동사 형태에 따르면 이 대답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어린 양으로 준비하시리라’라는 의미일 수 있다. ‘준비하시리라’(yir’eh lo)라는 동사가 ‘자신을 바치다’라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고통당하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시는 구원의 계획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복음 1:1~3과 로마서 5:6~8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이 모리아 산에서 있었던 희생을 통해 예표 된 바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롬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답: 창조주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신 것을 예표했다.
 
십자가 사건에 훨씬 앞서 모리아 산에서 ‘뿔이 수풀에 걸려 있던 숫양’(창 22:13)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아브라함이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 자신이셨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창 22:14). 훗날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예언적 발언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동시에 복음의 실재를 그의 마음에 새겨주기 위함이었다. 그 무서운 시련의 어두운 날 동안 그가 참은 고통은 그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속하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려고 허락되었다”(부조와 선지자, 154).
 
<묵상>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사건이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아브라함의 고통은 말씀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고난 당하실 때 성부 하나님도 함께 고난 당하신 것을 알게 한다.
 
기독교는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값비싼 댓가가 치러진 이 대속적 죽음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유일한 희망입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오늘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음을 기억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가설명>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뜻이다. 구원 사업은 지구에 사는 아담 후손들만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주에 자신을 판단하게 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3,4). 이 말씀에 하나님께서 판단 받으실 때 이기려 하심이라고 계시하셨는데, 그것은 의롭다는 사실을 온 우주, 사탄까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시겠다는 뜻이다. 사탄이 된 루시퍼는 우주에 다니면서 삼위일명 여호와가 독재한다고 참소하였다.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자기 지위를 떠난(유 6) 루시퍼 일당은 우주에 하나님을 참소하려고 돌아다녔다. 이것은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표현했다(유13). 그러다가 지구의 아담 부부를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지구를 점령하여 지구가 흑암의 세계가 되게 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의 거짓이 우주에 완전히 드러나면서 지구에 갇혔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게 되었다. 결과로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15:4). 주님의 의로우심이 우주에 드러나고 만국이 와서 의롭다고 경배한다. 루시퍼의 속임이 완전히 폭로되고 루시퍼는 우주에서 존재가 사라져야 한다고 확정되고 하나님은 의롭다고 경배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결과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은 영감으로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라고 말했고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라고 나타내셨다. 구원사업은 이 모든 것이 한 꾸러미로 엮인 우주적 사없이다. 구약성경에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말이 여기 처음 나오고 질문이다. 신약성경에 ‘어린양을 보라’라고 했을 때 ‘어린양’ 신약에 처음 나오는데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했다. 구약의 질문에 신약의 대답이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교훈>
모리아 산 수풀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발견한 숫양은 장차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실 예수님의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5월 17일(화) 사라의 죽음
 
우리는 창세기 22:23에서 리브가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보게 되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있을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을 예상하게 한다(창 24장).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과 장례는(창 23장), 미래에 있을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결혼을 예상하게 한다(창 25:1~4).
 
창세기 23장을 읽어보라. 사라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창23:1~20]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5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8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9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10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아 있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1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2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13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5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답: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아주 비싼 값이라도 두말없이 그 땅을 사서 사라의 장지를 삼은 것은 가나안 땅의 정당한 소유자라는 것을 증거 하는 사건이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사건 후에 사라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사라가 그녀의 아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었던 이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 준다. 사라가 아브라함이 했던 여행들과 그가 저질렀던 믿음의 실수들의 순간에 함께 했던 것처럼(창 12:11~13), 사라는 이 ‘시험’의 순간도 아브라함과 함께 통과했을 것이다.
사라가 그 사건 후에 그 일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마침내 그 일에 대해 알게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사라는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들 또는 그녀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들 앞에서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창 16:3~5, 18:15, 21:9, 10). 그녀의 부재와 침묵, 그리고 그 극적인 사건에 이어 그녀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비록 그녀가 그 현장에 함께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그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더 분명히 말해준다. 아브라함의 나이 많음이(창 24:1) 언급되듯이 사라의 나이 많음 또한 언급된 것은(창 23:1), 이 이야기에서 그녀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여자의 나이가 언급된 것은 사라가 유일한데, 이는 비록 사건이 일어난 후라 할지라도 이 사건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23장에서 사라의 죽음보다 그녀의 장지 구입을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23장의 대부분을 차지함), 그녀의 죽음과 약속의 땅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사라가 “가나안 땅에서...죽으매”(창 23:2)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사라의 죽음이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가족들 가운데 죽어서 약속의 땅에 장사 된 첫 번째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가리켜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하며 헷 족속에게 끈질기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관심이 단순히 장지를 구하는 것을 넘어, 그 땅에 완전히 정착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묵상>
창 23: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당시 아브라함이 어떤 평판을 받고 있었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시려고 한 일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헷족속 중에 거하는 하나님의 방백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라는 것을 알게 하는 말이다.
 
<부가설명> 사라는 아들이 번제물이 될뻔한 사실을 안 후에 충격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가나안 땅에서 127세에 잠들었다. 저자의 말대로 성경에 여자의 수명이 기록된 유일한 경우이다. 또 아브라함의 가족 중에서 가나안 땅에 묻힌 첫 번째 사람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사라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을 뿐이다. 편히 잠자는 곳은 자기 집이다. 사라를 가나안 땅에 장사한 것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안의 침상으로서(사57:1,2) 아브라함에게 주신 기업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은 400세겔은 당시 땅 값으로 대단히 비싼 값이라고 주석은 말한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바벨론의 기록에는 당시 보통 땅이 1에이커(4046.8평방미터)당 4세겔에 팔렸고, 가장 비옥한 밭은 1에이커당 40세겔에 팔렸다고 나와 있다. 바벨론의 기준을 따르면 아브라함은 그 돈으로 100에이커의 땅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에브론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없지만, 에브론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처지를 이용했다는 인상을 모세가 남기려는 것처럼 보인다”(재림교회 주석). 그러나 값의 고하를 물론하고 아브라함이 두말 없이 산 것은 이 땅에 자기 도장을 찍으려는 믿음의 행사였다. 아브라함 생존 시에 가나안 땅의 그의 소유는 오직 이 무덤과 거기 속한 얼마의 땅 뿐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행7:4,5), 그런데 사라를 위하여 묻힐 땅을 산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아브라함 삶의 모든 걸음이 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실천한 것이었다. 우리도 그런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교훈> 사라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사건 이후 가나안 땅에서 죽게 되는데, 그녀의 죽음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5월 18일(수) 이삭을 위한 아내
 
창세기 24장은 사라가 죽은 후에 있었던 이삭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두 이야기는 관련이 있다.
 
창세기 24장을 읽어 보라.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이 가나안 족속의 여인과 혼인하지 않기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답: 당시 가나안 문화는 사망문화의 집약이었다. 레위기 18~21장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래도 아브라함 가정의 사람을 택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존할 가능성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 땅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장사하기 위해 그 땅을 얻고자 했던 것처럼, 이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이 약속의 땅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창 24:7). 또한, 이삭이 그의 신부를 사라의 장막으로 들인 것과,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창 24:67) 리브가가 이삭을 위로했다는 기록은 다시 사라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며, 이삭이 어머니를 잃고 얼마나 슬퍼했는지를 보여준다.
창세기 24장은 기도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득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에 관한 교훈들로 가득하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말로 시작된다.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창 24:3)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아브라함은 먼저 메시아를 포함한 자기 자손들의 탄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한다(창 1:1, 14:19).
“그 사자”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라는(창 24:7) 표현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늘로부터 내려온 여호와의 사자를 떠올리게 한다(창 22:11).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삭을 살리기 위해 개입하신 여호와의 사자가, 이 결혼의 과정 또한 인도하실 것이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여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가능성 또한 열어 둔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사람에게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리브가가 엘리에셀을 따라오는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 자유로운 선택의 신비를 본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유를 결코 짓밟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 자유의지로 저질렀던 끔찍한 선택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마침내 승리할 것임을 신뢰할 수 있다.
 
<묵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심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니엘 2장에 기록된 것과 같은 예언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어떻게 보여주나요?
 
답: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을 때 내게 불이익이 있어도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가장 좋은 복이 약속대로 일루어질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부가설명> 결혼은 결혼 후의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 했다(고후6:14~16). 그것은 벨리알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벨리알은 사탄의 별명이다. 베드로가 그 위대한 고백을 한 직후에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말했을 때 붙잡고 그러지 말라고 간한 것을 사탄의 일이라고 책망하셨다(마16:22,23).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사탄의 하수인이 되었다. 좋은 뜻으로 배우자와 결혼하지만 불신자이고 신앙 사상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사탄의 틈 탈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결혼해서 믿도록 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몰라서 이런 말씀을 주셨겠는가? 그런 발상은 하나님이 무얼 모른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 신중하게 동족, 곧 신앙의 동족과 결혼해야 한다. 그래도 확신할 수 없다. 부부가 항상 서로 섬기며 주님께 굴복하고 아침마다 저녁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낮추고 용서하고 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예수님처럼 하고 아내는 남편에가 충성하는 교회처럼 해야 한다(엡5:22~33). 베드로는 남편과 아내에 권고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2,7). 그리스도인은 삼손 같은 마음으로 결혼하면 안 된다. 주님의 뜻을 따라 결혼하는 것이 안전하고 행복한 길이다. 결혼 후에는 진심으로 서로 섬기며 살 것이다.
 
<교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를 찾는 모든 과정 가운데 함께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정 속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셨다.
 
 
5월 19일(목) 아브라함을 위한 아내
 
창세기 24:67~25:8을 읽어 보라.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이 마지막 사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창24:67~25:8]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25: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답: 이삭이 아내를 얻어서 모친이 떠난 빈 자리의 위롤 얻은 것처럼 아브라함도 아내가 죽은 후에 후처를 얻어서 위로를 얻었다. 사람들은 위로가 필요한 존재다. 아브라함이 후처의 아들들에게 재산을 조금 나누어주고 이삭에게는 모든 것을 줬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편히 잠들었다. 그는 비로 자기 자식들이었으나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은 약속의 아들과 육체의 아들들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은 다시 결혼했다. 이삭처럼 사라의 죽음 후에 아브라함도 위로를 받았다(창 24:67). 이삭이 자기 어머니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아브라함 역시 사라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새로운 아내의 정체가 불분명하다. 역사가들이 그두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두라의 아들들을 하갈의 아들들과 연관 지어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두라가 하갈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아브라함이 그두라의 아들들을 하갈의 아들과 같이 대한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아브라함은 어떤 종류의 영적 영향력도 피하고자 그 아들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과 그들을 명확히 구별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창 25:5), 자기 서자들에게는 재산의 일부를 선물로 주었다(창 25:6). ‘첩’이라고 구분한 것 또한 하갈과 마찬가지로 그두라 역시 첩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두라와의 결혼에 대한 기록에 앞서 사라를 기억하는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 역시 그두라와 하갈이 같은 인물일 가능성을 말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창세기 25:1~4, 12~18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이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의 목록과 이스마엘의 자녀들의 목록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두라와 결혼한 후에 갖게 된 여섯 자녀를 기록해 놓은 족보의 목적은, 아마도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즉각적인 증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두 번째 족보는 훗날 야곱과 마찬가지로(창 35:22~26) 열두 족속을 갖게 된(비교, 창 17:20) 이스마엘의 자손에 관한 기록이다.
두 개의 족보 사이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죽음(창 25:7~11)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증거한다. 그것은 여러 해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장수”(창 15:15)하리라고 하셨던 약속의 성취를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신실한 종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약속들을 이루어 주셨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구약에 기록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위대한 실례가 된다(참조, 롬 4:1~12).
 
<묵상>
하나님의 약속과 그에 대한 신뢰로 가득한 아브라함의 삶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처럼 철저히 말씀에 의하여 생활하는 것이 정로이다.
 
<부가설명> 그두라가 하갈과 동일인이라는 어떤 학자들의 주장이 옳은지 증명 되지 않는다. 성경을 보면 하갈은 이스마엘을 애굽 여자와 결혼시키고 이스마엘이 동방으로 갔다는 기록 후에 하갈 이야기는 없다. 25:6절에 ‘서자’라는 말의 원형이 ‘벤 피레게쉬’인데, ‘피레게쉬’가 ‘첩’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니 ‘벤 피레게쉬’는 첩의 아들들이라는 말이다. 한글 킹, 바른 성경, 새번역에는 다 첩들이라고 번역했다. 첩들이라는 표현은 하갈과 그두라를 함께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하갈과 그두라를 동일인으로 보는 것은 성경 기록과 다른 설명이 된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약속의 아들은 약속의 땅에 살도록 했다. 그의 일생은 나그네 생활이었다. 히브리서는 그가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본향 찾아가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히11:13). 그리스도인은 이 지구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이다. 영원한 본향 하늘을 찾아가는 여행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하늘나라가 본향인가 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나지 않았으면 하늘이 본향이 아니다. 그들이 땅의 본향을 찾은 것이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하나님이 지으신 그 성을 찾아 가는 나그네라고 했다. 그들은 거기가 본향이었다. 그곳이 본향인 사람들은 진정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진정 약속의 아들인가? 육체의 아들인가? 스스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훈>
사라의 죽음 후에 그두라와 다시 결혼하여 위로를 받은 아브라함은 마침내 백칠십오 세를 살고 죽었으며 그의 삶은 위대한 믿음의 모본으로 남게 되었다.
 
 
5월 2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삭은 세상 죄를 위해 희생물로 드려진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기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서, 또한 그의 믿음을 시험함과 동시에 이 진리를 그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드리라고 요구하셨다. 그 어둡고 두려운 시련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견뎌 낸 모든 슬픔과 고뇌는 타락한 인간을 위한 구속의 경륜을 그의 이해력에 깊이 새겨 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완전한 멸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돌아가시도록 주신 무한하신 그분의 자아 부정이 어느 정도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이었는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어떠한 심적 고뇌도, 그의 아들을 희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견딘 그 고뇌와 같을 수 없었다”(교회증언 3권, 369쪽).
 
“아브라함은 이제 노인이 되었고 오래지 않아 죽으리라고 생각되었으나 그의 후손에 관한 약속의 성취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가 할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었다. 이삭은 하나님의 율법의 수호자와 선민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계승하도록 하나님의 지정을 받은 사람이었으나 아직 미혼이었다. 가나안 주민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결혼이 배교로 인도할 것을 아시고 당신의 백성과 그들 사이의 통혼을 금하셨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두른 부패케 하는 감화의 결과를 두려워하였다.…아브라함의 심중에는 자부 선택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지 않을 사람과 결혼시키고자 갈망하였다.…아버지의 지혜와 애정을 신뢰하는 이삭은 그 문제를 아버지에게 맡기는 것에 만족하였으며 또 선택하는 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지도하여 주시리라고 믿었다”(부조와 선지자, 17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반원들과 함께 이삭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에 관해 이야기해 보라. 이 사건에서 보게 되는 믿음을 상상해 보라. 이 이야기의 무엇이 놀라우며 또한 무엇이 불편한가?
※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듣기에 불편한 명령이다. 아브라함은 묵묵히 순종하였다. 정말 놀라운 믿음이다.
 
2.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 자유의지에 관한 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우리의 잘못된 선택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가?

※ 이 질문 자체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선택해놓은 범위 안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제한된 자유의지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해놓은 것이 없으면 인간 스스로의 선택은 없다. 이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미 있는 것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인데, 이미 있는 그것은 전부 하나님의 선택이다. 온전한 자유의지는 자존자시며 생명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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