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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7 그분의 당혹스런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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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년 작성일08-05-09 11:27 조회4,2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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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목표>

1. 주님의 이상한 행동의 이면에 감추어진 동기를 깨닫는다.

<서론>

☆존경하는 목사님이 어느날 골목 슈퍼에서 술을 사는 것을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은 “저런 위선자!”, 혹은 “내가 잘못 보았나?” “목사님도 스트레스를 저렇게 해소하나 보지.” 그러나 이런 생각도 가능하다. “뭐할려고 술을 사지?” 아마 그 목사님은 실험을 하기 위해, 혹은 나무에 영양제로 쓰려고 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의 행위만 보고 그의 동기까지 판단한다. 그로 인해서 수많은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판결을 내린다.
예수님의 행위만 보고 그분을 판단할 때 우리는 큰 손해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분의 당혹스런 행동 이면에 있는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몇가지 행동들을 살펴보고 교훈을 찾아보자.

<본론>

1. 눅 2:41~51에서 주님은 육신의 부모에게 어떤 당혹스런 모습을 보여줬는가?
▷그분이 12세였을 때 부모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러갔다가 사흘동안이나 찾게 만들고, 찾아서 나무라는 부모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라고 되물었다.
쉽게 납득이 안되는 대목이다. 왜 그랬을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랬을까? 그분도 어려서는 철이 없었을까?
☞교과 94 1문 아래 [표면상으로 볼 때 예수님은 마치 염려하고 고생한 부모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소년처럼 보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미 12살의 어린 나이에 당신의 메시야 되심을 인식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부모를 매우 존경했으나, 그들보다 무한히 높으신 하늘 아버지의 권능에 충성해야 할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사흘길을 헤멘 후에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말씀을 나누는 예수님을 발견했다. 그들은 평소에 너무나 순종적이었던 아들이 자기들을 따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그분을 책망했으나, 예수님은 도리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반문했다.
예수님이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대하셨는가? 아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나기 전부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미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육신적인 생각으로 언제까지나 자신들의 착한 아들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더 이상 그들만의 자녀가 아닌 온 인류의 구주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아야 했다.
또한 예수님이 일부로 부모들을 애먹인 게 아니라 그들의 무관심이 예수님이 있어야 할 곳을 모르게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보다 높으신 하늘 아버지의 성전에서 봉사하셔야 했던 것이다.

고려장이 유행하던 시대,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와 함께 산에 버리고 오려는데, 함께 갔던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도로 지고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왜 지게를 도로 가져오느냐?”고 하자, “저도 아버지가 늙으면 이 지게에 지고 가서 산에 버리려고요” 했다. 이에 그 사람이 크게 뉘우치고 늙은 아버지를 다시 모시고 내려왔단다. 그 어린 아이는 자기 아버지보다 더 크신 할아버지를 존중해야 함을 알았다.
우리는 부모보다 더 크신 하늘 아버지의 말씀에 더욱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엡 6:1)

2. 마 21:12~13의 예수님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신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드럽고 좋은 말로 타이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주님은 왜 그렇게 노한 모습을 보이셨는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탐욕의 정신으로 강퍅케 되었다. 제사장들과 결탁한 상인들은 성전에 제사하러 온 여행객들에게 희생으로 드릴 가축들을 지나치게 높은 가격으로 팔아 폭리를 취하였다.
성전이 어떤 곳인가? 그곳은 예수님의 희생을 상징하는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었다.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소망없는 죄인이 구원을 경험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그런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은 돈에 눈이 멀어 그 희생제물의 실체가 되시는 분이 거기 서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얼마나 애통하고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토록 거룩한 희생제사를 짓밟고 있는 가증한 자들에게 당장에 저주의 불을 내려도 시원치 않으리라. 그러나 그분은 단지 그들의 상을 뒤엎는 행동으로 그들의 엄청난 죄악을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16장 ‘성전에서’ 참조)
☞교과 98, 99 참조

3. 마 8:28~32, 예수님은 왜 남의 돼지떼를 바다에 빠져 몰사하게 하셨는가?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위해 남의 재산에 손해입히는 것도 서슴지 않으신 몰지각하고 배타적인 분이셨는가? 아니라면 무슨 뜻이었을까?
그분은 세상의 어떤 귀한 보물보다도 한 영혼의 가치가 더 귀하다는 교훈을 주고자 하셨다.
1) 무덤에 거하던 사람에게 수많은 귀신이 들려 있어서, 주님이 그 귀신들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하심으로 귀신들이 나갔고,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2) 귀신들이 예수님께 그러면 자기들을 돼지떼에게 들어가도록 간청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들의 간구를 물리쳤다면 또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 그 영혼도 괴롭혔을지 모른다.
3) “돼지의 소유주에게 이런 손실을 허락하신 것은 바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사물에 골몰하여 영적 생애의 큰 관심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저들이 당신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기적 무관심의 마력을 깨뜨리기를 원하셨다”(시대의 소망, 338).(☞교과 98 아래쪽)

오늘날 세상은 사람의 목숨을 얼마나 사소하게 여기는가? 돈을 위해서라면 아무런 가책도 받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자녀들의 영원한 운명이 걸린 신앙 문제는 뒷전이다.
예수께서 한 영혼을 위해 흘리신 피,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라. 그토록 귀중한 영혼을 어찌 세상 귀한 것들과 바꿀 수 있겠는가?

4. 자신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침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마 4:12~13, 11:2~3, 14:1·3)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을 본 다른 제자들이 요한에게 보고하자, 그는 질투하는 대신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할 만큼 주님을 위해 자신을 전혀 무가치하게 여긴 요한이었다.
그런 그가 헤롯왕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위문을 가지 않으셨다. 그가 옥에서 목베어 죽임을 당할 때도 주님은 그를 위해 조문을 가지 않으셨다. 이건 배신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은 세 가지 이유로 그렇게 행동하셨다.(☞교과 101 학습도우미 참조)
1) 주님은 요한이 능히 그 시험을 견뎌낼 것을 아셨다.
그렇다고 목사님이 입원했는데 문병 안해도 된다고 하진 말라. 왜냐 하면 요한만큼의 믿음을 가진 목사는 거의 없을 테니까.
2) 그분이 요한을 방문하게 되면 그분 자신도 헤롯에게 위협을 당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자신의 사명을 다 이루지 않으셨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시험을 자초하실 필요가 없었다.
3) 후대에 요한처럼 고독하게 순교를 당할 사람들에게도 실망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의 순교 현장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다른 사람들의 순교현장엔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얼마나 절망하겠는가? 그러나 요한이 예수님이 그 자리에 없이도 순교를 기쁘게 당한 것을 생각하고 후대 사람들도 홀로 당하는 순교에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무관심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요한이 옥에 갇혀 사람들에게 가리워졌을 때, 그분은 요한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 제일 큰 자, 엘리야의 사명을 가진 자라고 일깨워주었다.(마 11:7~14)
주님이 나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요한을 생각하라.

5. 주님은 탐식가요 술꾼이요 악인들의 동료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저속한 자들과 어울리신 이유는 무엇인가?(마 9:10~13, 11:18~19, 눅 5:32)
▷주님은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술마시는 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런 과장된 소문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 속담에 “瓜田不納履(과전불납리; 남의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신지 말고), 李下不整冠(이하부정관;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고 했다. 남에게 오해받을 짓을 부러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오해받을 일을 많이 하셨다. 그 중 하나가 사회에서 가장 손가락질 당하는 저질적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눈 일이다. 왜 그랬는가?
사실은 그것이 그분의 사명에 가장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마 9:13) 주님은 자신의 체면이나 위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장 비천한 곳이라도 서슴지 않고 내려가셨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에 계시건만 우리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만 하나님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과 교회가 체면과 명예에 손상이 될까봐 술꾼들이나 저속한 자들을 멀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가장 낮은 곳에 처해야 한다.
어떤 목사님이 삼육대학 기도주일 강사였을 때 하신 말씀이 참 감동적이었다. 술을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에게 가끔 전화로 그런단다. “나한테 한번 놀러와. 내가 술 한잔 사줄께.” 정말로 그 친구를 위해 술을 사준다면 목회자의 신분을 망각한 행위일까?

☞교과 103 학습도우미 [병든 자를 구하러 오신 크신 의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영적으로 건강하므로 의사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세리들과 이방인들은 영혼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어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의사로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시는 것은 그분이 하실 일이 아니었던가?
... 세리들은 고집과 자부심이 덜했으므로 진리의 감화에는 마음 문이 더 열려 있었다”(시대의 소망, 275).]

<적용>

1.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오해와 비난을 받더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겠는가?


<결론>

1. 주님의 상식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셨다.
2. 그분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비난과 오해도 달게 받으셨다.
3. 우리도 영혼구원을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초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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