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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그분의 당혹스런 행동(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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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5-08 23:13 조회4,4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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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그분의 당혹스런 행동
5월 17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6분)

도입)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통해 구원의 기쁜 소식(복음)을 전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적을 통해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태는 그들의 편견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말한다.'(마 11:19) 또한, 요한복음은 그들의 무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당대의 종교 지도자인 사두개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와 바리새파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행동 하나하나가 종교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들만 하나님의 법(율법)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자부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격분시켰다. 그들 생각에 가난하고 무식한 민중들은 아예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창녀와 세리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며 그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안식일법과 정결례법(씻는 예절)도 지키지 않는 참으로 처치 곤란한 존재였다. 특히 권력을 쥐고 있던 제도권은 많은 민중이 예수를 따르고 있고 그 때문에 소요가 발생하고 그렇게 되면 로마 점령군이 개입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마땅히 "사라져야할 인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2:10)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유대인들에게 무엇이든지 당혹스런 모습으로 비출 뿐이었다.

기억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마 11:19).

연구범위: 마 4:12-13, 8:28-32, 11:18-19, 21:12-13, 눅 2:41-51, 5:32, 고전 1:26-28.

안식일 오후
지난주에 우리는 현대인들이 듣기에도 당혹스러운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공부했다. 이번 주에도 비슷한 문제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분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것이다.
예수님에 관해 탐구할 때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문제 중 하나는 그분을 인간적인 생각의 범주로 끌어내리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급진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그분을 우리와 똑같은 분으로 만들어 버리고, 사교적 보수주의의 성향을 가진 이들은 그분을 우리가 머무는 곳에 함께 계시는 분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어느 정도 이러한 현상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문화와 상황을 기반으로 하여 실체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문제가 파생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그나마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인간적인 견해를 뛰어넘어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바라도록 도와 줄 것이다.
일단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작은 상자 속에 가두어두지 않게 되고, 그분을 조그마한 꾸러미 속에 묻어 두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행동의 진정한 의도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접근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몇몇 당혹스런 행동들을 탐구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혹은 적용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5월 11일)
부모를 경홀히 여기시다?

도입)
예수님께서 부모님을 근심케 했고 부모님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라고 해서 예수님이 불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절기 후에 허락되었던 성전에서의 선생님들과의 대화중에 있었고 그것은 그 당시에 보편적으로 있었던 일로서 오히려 요셉과 마리아가 이 일을 미리 알았어야 했었는데 그만 잘못 판단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소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모님이 내가 성전에 있는 줄로 알겠지 라고 했던 것 같이 여겨진다. 이런 말씀의 반문이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시간 우리도 사람들이 우리의 소재가 잘 파악되지 않았을 때 교회에 가면 우리를 만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격무 속에서도 그가 예배일에 빠짐이 없었고, 영국의 윌리암 경은 그를 찾는 손님이 그의 집에서 만날 수 없을 때 교회로 가보면 어김없이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늘 있어야 할 곳, 가까이 해야 할 곳이 있다면 주의 성전, 교회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30세까지의 생애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적은 정보 중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끄는 한 사건이 있다.

1. 누가복음 2:41-51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부모에게 대하신 모습은 얼핏 어떤 인상을 줍니까? 한편 여기에는 어떤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까? 그 일에 대한 실마리를 47절에서 찾아 보십시오.
답:
표면상으로 볼 때 예수님은 마치 염려하고 고생한 부모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소년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떤 부모가 가족의 편익과 규율을 위해 이처럼 명백하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행동을 인용할 때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 중 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미 12살의 어린 나이에 당신의 메시야 되심을 인식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부모를 매우 존경했으나, 그들보다 무한히 높으신 하늘 아버지의 권능에 충성해야 할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누가복음의 이 짤막한 기사는, 그 사흘 동안 누가 이 소년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는가? 제사장들은 소년 예수의 부모를 찾는 데 관심이 없었는가? 등 수많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남긴다.

2. 예수께서 당신의 부모에게 하신 대답을 읽어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간접적으로나마 무엇을 말씀하고 계셨습니까?
답:
누가는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50)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자녀로서 순종하며 받드셨다. 그러나 그분은 더 높은 권위에 충성을 다 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셔야만 했다. 소년 예수께서 부모에게 끼친 극심한 염려와 불편에 대해 사과했다는 어떤 간접적인 암시도 성경에는 없다.

교훈: 소년 예수께서는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효성을 다해 섬기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더 높은 충성의 의무도 인식하셨다.

부가적용)
윌버트 채프맨 박사는 어떤 교회 집회에 모인 4500명을 통하여 이런 통계를 얻었다. 그중에 예수님을 영접한 아이들을 조사해 보니, 10세 이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400명이었고, 10-14세 사이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600명이었으며, 16-20세 사이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1000명이었고, 36세 이후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24명이었다고 한다. 이 통계를 흥미롭게 지켜본 채프맨 박사는 많은 대중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조사를 해보았더니 25세 이후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1천명에 1명 꼴이고, 35세 이후에는 5만 명에 1명, 45세 이후에는 20만 명에 1명, 55세 이후에는 30만 명에 1명, 75세 이후에는 70만 명에 1명 꼴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어린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어렸을 때 예수님을 믿게 하고 은혜를 받게 하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해야지 나이가 들면 힘들어진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 계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하다. 잃어버린 주님을 집에서, 직장에서, 학원에서, 오락실에서 찾을 수 없었다. 우리 주변 세상 그 어디에서도 주님을 찾을 수 없었고 오직 성전에서만 그분을 찾을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에 자녀들을 두는 것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공경하게 하고 하늘 아버지께 더 높은 충성의 의무를 행하게 할 것이다.

월요일(5월 12일)
화를 내시다?

도입)
주님과 함께 네 사람이 산 위에 머무르는 동안 밑에서는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에게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고자 힘썼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아이의 아버지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가 토로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들으신 후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시고 아이를 고쳐주셨다. 이 기적 사건은 물론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더 중요한 강조점은 왜 남아있던 다른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이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에 관하여 분명하게 설명해주신다. 먼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41절)라는 말씀을 통하여 그 당시의 잘못된 분위기를 총체적으로 평가하신다. 이와 동시에 구체적으로 그러한 세대에 속하여 그들과 구별하기 힘든 모습으로 전락한 제자들을 야단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보자면 우리가 사는 세태의 영향력에 조심하여야 한다. 불신과 회의로 가득한 세상의 정신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각과 신앙에 바이러스와 같이 들어와 우리를 영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 12:2)고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에 있던 군중으로부터 한 남자가 나아와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제자들에게도 데려갔으나 그들이 고치지 못했다고 설명하였다. 그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노여움이 묻어나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마 17:17). 이러한 어조는 적어도 우리가 알아 온 ‘온유하고 부드러운 예수님’의 특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이다. 복음서에는 분명히 예수께서 노하신 다른 경우들도 언급하고 있다.

1. 다음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마 21:12-13, 막 3:1-5).
답: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고 자문하는 것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에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위의 구절들을 오늘날 우리의 행동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예수님이라면 오늘날 어떻게 행동하실까 하는 가정은 그분이 1세기에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틴에서 실제로 어떻게 행하셨는가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나 성전을 뒤엎으신 일과 같은 특이한 사건들은 오늘날의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만일 자주 가는 식료품 가게에 사고 싶은 어떤 과일이 아직 계절이 아닌 까닭에 진열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진열대를 저주하고, 농산물 담당자에게 호통을 치며, 눈에 보이는 대로 저주를 퍼부어야 하는가? 그리고 만일 설교자가 돈에 대해 너무 많이 강조하거나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이 대체로 화나게 만든다면 예배 도중에 일어나 의자와 강도상을 뒤집어엎고 던질 수 있는 것은 내던지며, 안내자들을 성전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가?”(F. 스코트 스펜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행하셨는가?, ix).

교훈: 예수께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의분을 일으키셨는데, 이는 우리가 보통 화를 내는 것과는 구분된다.

부가적용)
세 제자와 함께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하여 황홀한 체험을 하는 동안 산 아래 남은 제자들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것은 벙어리 귀신들린 외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찾아온 아버지의 요구대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고 서기관들이 그런 제자들을 공격하여 큰 무리 앞에서 비웃음을 받는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어 많은 무리가 둘러서 에워싸고 그 가운데서 변론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무엇을 서기관들과 변론하느냐고 물으셨다. 변론하는 당사자들인 서기관이나 제자들은 아무 말도 대답하지 못했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는데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셨다. 여기 너희는 누구를 가르키는가?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오리겐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 하였고 칼빈은 서기관들에게 하신 책망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아이의 아버지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이모든 무리를 다 향하여 책망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의 큰 능력을 보여주었던 그 수다한 기적들을 악의적으로 제거하고 그들 눈앞에 놓여진 빛을 한사코 꺼버리려 하였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쳐줌으로써 가진 능력을 보이라고 압력을 가했고 제자들은 이 아이를 고쳐보려고 힘썼으나 실패하였고 그리하여 서기관들은 승리자로서 기뻐하고 있었으며 제자들을 야유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패역한 자들이며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를 보시고 탄식하며 책망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의 아버지도 22절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이는 그리스도를 어떤 선지자로서의 능력이 한정되어 있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의 칭호만 봐도.(선생님이여!)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책망하였다. 또 자신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했는데 그도 믿음이 없는 세대였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17:20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그들의 믿음의 수준은 이처럼 형편없었다. 여기에 대한 탄식과 함께 그들의 불신과 거스리는 패역을 책망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무한하심을 계시하신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주님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모자라서 못하시는 것은 없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혹은 믿음이 부족하고 적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빌4:13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님께로부터 풍성한 축복이 흘러오지 않는다면 이는 주님의 잘못이 아니며 우리의 좁은 신앙 때문이다. 우리가 충분한 믿음의 분량을 가진다면 다함이 없는 능력이 솟아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강하고 사나운 귀신이라도 제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시다. 우리가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제어하시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에게도 완전한 신앙이란 없다. 우리도 부분적으로 불신앙자들 임에 틀림없다. 이 아이의 아버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부르짖자.

화요일(5월 13일)
남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시다?

도입)
갈릴리 바다를 풍랑 가운데 건넜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제일 먼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서 3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는 집이 없이 무덤 사이에 거주했고, 둘째는 워낙 괴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고, 셋째는 귀신들린 사람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귀신들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시고자 그 사람에게 붙어 있는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명령하셨다. 그 말씀이 그대로 이뤄져서 귀신들이 들어간 2000마리의 돼지 떼가 바다로 뛰어들어 몰살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돼지를 치는 자들과 마을사람들이 달려와서 예수께서 그 동리를 떠나시도록 요구하였다. 예수님의 관심은 2000마리의 돼지보다 귀신에게 억눌려 살아가는 한 영혼에게 있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2000마리의 엄청난 돼지 떼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한 영혼을 건져내고자 했던 분이셨다. 그러나 돼지를 치는 자들과 주인들은 재산상의 손실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예수님께 떠나실 것을 요구했다. 물론 오늘 예수님의 결정을 경제학자의 눈이나 경영가의 눈으로 보면 이는 필시 실패한 경영이요, 무가치한 투자를 한 것과 같다. 그러나 집에서 버림받고 귀신들려 이곳저곳을 헤매며 짐승처럼 살아가는 한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정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에게 자유와 건강을 주시기를 원하셨기에 이런 결정을 하실 수 있었다.오늘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리의 귀신들린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바로 전도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심정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를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야성적인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이번 주 교과는 예수님의 행동을 우리의 모본으로 삼는 비결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철저히 ‘그분의 본’을 따라야 하는가? 이것은 가장 주의 깊은 판단을 요하는 문제이다. 그분의 행동 가운데 대부분은 우리가 분명히 따라야 할 모본이지만 어떤 행동은 우리가 어떻게 따라야 할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다.

1. 마태복음 8:28-32(비교 막 5:1-20, 눅 8:26-39)과 마태복음 21:18-19(비교 막 11:12-14, 20-21)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왜 그 귀신들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까? 만약 그 동물이 양이었다고 해도 그분은 같은 일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행동에서 동정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 가축들은 그 마을 사람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답:
“만일 이 돼지가 이방인들의 소유였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몰사한 것에 대해 구구한 설명 없이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단지 귀신들로 하여금 그 사람들에게서 떠나도록 명령하셨는데, 귀신들이 스스로 돼지에게로 들어갔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맞지 않으며, 예수께서 그것들을 허락하셨다고 기록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진술과 모순이 된다”(R. C. H. 렌스키, 마태복음 주석, 옥스버그 출판사, 1943년, 353).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의 행동을 하나의 ‘강력한 저항’으로 본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군대’라는 이름과 돼지라는 동물은 로마 군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포악한 로마에 대해 저항하신 것이었다”고 하였다(F. 스코트 스펜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행하셨는가, 101).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돼지의 소유주에게 이런 손실을 허락하신 것은 바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사물에 골몰하여 영적 생애의 큰 관심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저들이 당신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기적 무관심의 마력을 깨뜨리기를 원하셨다”(시대의 소망, 338).

교훈: 예수께서는 한 영혼의 가치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돼지 떼의 소유주를 비롯한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정말 천한 사람을, 아니 모든 사람이 천하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을 만나셨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셨고, 그 사람의 형편을 살피셨으며, 해결불능의 상태에 빠진 사람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회피하고, 도외시 하였던 이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군대귀신 지폈던 이 사람으로 인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사람 또한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주고, 더불어 외로움을 달래 줄 단 한 명의 벗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너무나도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다가와서 말을 걸어 주셨고,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더러운 귀신을 내 쫓으셨을 뿐 아니라, 2천 마리 가량 되는 돼지 떼로 이 사람의 목숨 값을 삼으셨다. 요즘 돼지 한 마리의 가격이 산지에서 20~22만 원가량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 소매 시장에서는 25만원 정도면 한 마리를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돼지 2천여 마리의 가격을 여기에 한 번 대입해 이것을 도매가격으로 계산하여 마리 당 20만원으로 잡고 곱하기 2000을 해 보았다. 4억원이라고 하는 재화로 환산해 볼 수 있다. 이것은 한 농가의 전 재산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설사 이 정도의 액수를 유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 사람을 위해서 쉽게 내 놓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귀신의 굴레 아래 있던 사람을 위해 돼지 2천 마리 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 뿐만 아니라 한 농가의 전 재산이었을 수 있는 가축을 잃게 된 주인들 또한 주님의 행하심 앞에서 손해배상을 받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거라사 지역의 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은 한 사람을 이렇게 귀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이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셨듯이 오늘 우리를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대해 주신다. 지극히 작은 자라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은 존귀하게 여기시며, 그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나는 일을 그렇게 기뻐하신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진실한 사랑을 입은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따라올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대신 본 동네에 돌아가서 자신에게 행하신 주님의 일을 전하라고 하셨다.

수요일(5월 14일)
핍박받는 자들에게 무관심하시다?

도입)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누가 그것을 평가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보는 관점과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인생의 가치기준도 어떤 관점에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여러 직업들 중에 각종 감정평가사들의 인기가 높다. 수백억 수천억을 넘는 토지와 건물의 가치가 그들에 감정과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감정평가사의 관점에 따라 각기 다른 가치를 제시받게 된다. 참된 인생의 가치와 평가는 누가 하게 될 것인가? 인간인가? 사람인가?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 인생의 유일한 감정평가사가 되신다. 사실상 예수님 외에는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우리의 인생의 가치를 감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분은 없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 귀, 공, 명이라는 인간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진리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인생을 바라보시고 평가하신다. 예수님께 침례요한을 평가하실 때 그의 인생은 어떤 평가였는가? 나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평가하실 때 어떤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받을 것인가?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시면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되 양과 염소 두 부류로 나눌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양의 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6)고 말씀하셨다.

1. 심판에 대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다음 본문들을 읽어 보십시오. 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 양의 편에 설 사람들의 행할 일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고려해 볼 때, 다음 본문들은 우선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줍니까?
마 4:12-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11: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14:1-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침례자 요한이 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 보이신 예수님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요한의 투옥 소식을 처음 들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갈릴리로 물러가셨다(마 4:12). 그리고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예수님의 방문을 받지 못했음을 마태복음 11:2-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요한은 예수님과 접촉하기 위해 자기 제자들을 보내면서 한 가지 질문을 전달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의 방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투쟁 중에 있는 선지자를 높이 칭찬하셨으나 그를 방문하지는 않으셨다.
우리를 가장 집요하게 괴롭히는 질문 중 하나는 시련에 관한 다음의 질문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요한의 경험으로부터 부분적인 해답을 얻게 된다. 예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이셨으나, 당신의 능력 있는 행동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위해 길을 예비한 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한 사실에 관해서도 그분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요한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교훈: 비록 예수께서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요한의 고독한 죽음은 후세대에 있을 수많은 순교자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었다.

부가적용)
침례요한은 평생 무소유 인생을 살았다. 광야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낙타털로 만든 단벌 옷 외에 그의 소유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자식도 없었고, 광야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는 지하 전세방도 없었다. 정부 보조금도, 구호단체에서 배달해 주는 도시락도 없었다. 침례요한의 인생은 철저하게 무소유 인생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이런 침례요한의 인생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침례요한처럼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그의 인생의 가치를 평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소유의 많고 적음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침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역사의 무대에 주연으로 등장했다. 그가 광야에서 기별을 외쳤을 때, 온 이스라엘이 벌벌 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별을 듣기 위해 광야로 몰려 나왔고 침례를 받았다. 제자로 거두어 달라는 문하생 지원자들이 줄을 이었다. 사람들은 침례요한이 메시야이기를 기대했다. 메시야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확실히 믿었다. 그는 화려하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인기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자 그는 주연 인생에서 조연 인생이 되었다. 침례요한의 인기는 급속하게 시들어 갔고 마침내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에게 쏟아지던 환호, 그를 향한 사람들의 열광은 이제 꿈속의 일처럼 되고 말았다. 그에게는 무대도 관중도 없었다. 너무도 급속하게 침례요한은 주연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우리 중 누구도 이런 침례요한의 인생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침례요한처럼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그의 인생의 가치를 평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지위, 역할, 직책이 그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천국에 가는 것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인 침례요한보다 인생의 가치를 높인다는 말이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 하나님의 나라에 있게 될 때, 우리 인생의 가치를 가장 높이게 될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인생의 유일한 감정평가사인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의 인생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평가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란다.

목요일(5월 15일)
저속한 자들과 어울리시다?

도입)
같은 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거스르면서까지 사랑과 진리와 의를 행하며 산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대정신과 생활양식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안일한 생활과 출세를 위해 그대로 좇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본받아야 할 구주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어디까지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사랑과 진리와 의와 자유로 일관된 생활 태도를 보여 주셨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일을 마치신 후에 지나가시다가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셨다. 예수님은 알패오의 아들인 레위가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로 삼기 위해 “나를 좇으라”라고 명하셨다. 당시에, 세리들은 관세, 특히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했다. 관세의 수입은 조세와는 달리, 로마 황제의 국고가 아닌 지방 군주의 금고로 들어갔다. 이 관세의 징수권은 세금 청부업자가 로마에 일정한 금액을 주고 사서 일 년 동안 행사하는 것이므로 부당한 징수가 매우 흔했다. 모든 세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세리들이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서 동족들에게 부당하게 과도한 세금을 매겨 강제적으로 거두곤 했다. 그러한 세리들 때문에, 유대 사회에서는 세리들을 버림받은 자들로 취급하여 상대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세리들이 이방인들과의 거래를 금하고 있는 율법을 어기고, 유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방인에게서 세금 징수권을 샀다는 점과 부당하게 과도한 세금을 거둔다는 점 때문에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미워하고 멸시했다. 한 마디로 말해,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세리란 창기와 함께 죄인의 대표 격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다. 이 일은 당시의 사회 통념에 대한 혁명적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대상자의 심리나 조건이나 자격 등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역사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 앞에는 모두 다 구원의 부름을 받아야 할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3:10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있다면, 스스로 의인 혹은 선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이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세리인 레위는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좇았다. 레위는 직장을 비롯한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제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남은 생애를 예수님을 위해 바치기로 결단했다.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고결하신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그분께서 당시 사회가 용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생각에도 주저하게 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셨음을 보게 된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종종 그분의 삶을 오늘날 우리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이처럼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이기 때문에, 그분의 행동을 그저 마지못해 억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그 당시에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신 일을 우리가 면밀히 살핀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거북함을 느낀다.

1. 다음 구절들을 숙고해 보십시오. 거기서 어떤 기별을 취할 수 있습니까?(마 9:10-13, 11:18-19, 눅 5:32, 고전 1:26-28).
답:
이 구절들을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예수께서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사람들과 교제하시기 위해 함께 앉아 식사하시는 장면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이 펼쳐지고, 크고 소란한 음악이 들려오며, 창녀들이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떠올려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곳으로 가셨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원수들이 그분을 향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마 11:19, 눅 7:34)는 가장 경멸적인 꼬리표를 붙인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방은 침례자 요한이나 간디에게는 어림도 없었으나, 예수님과 같이 파티와 연회에 자주 출입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적용될 뿐 아니라 과장되기도 하였다”(F. 스코트 스펜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행하셨는가, 90). 아무리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세상의 구주께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로 비난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받을 영혼으로 보셨으며 그들과 섞이심으로 구원의 진리를 소개하고자 하셨다.

부가적용)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감히 예수님께 힐문하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힐문했다.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스승인 예수님의 율법 위반을 일깨워 줌으로써 스승인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버리도록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행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경멸하고 비난하는 데 열성을 다했다. 그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값진 사랑의 삶을 위해 주어진 머리와 손발을 가지고 남들을 경멸하고, 또한 사랑의 예수님을 비난하는 데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값진 각자의 삶을 창조하라고 생명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가꾸기에도 인생이 짧은데, 남을 경멸하고 비난하기에 바쁘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가? 이처럼 세상에는 바보처럼 사는 똑똑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종교 지도자들의 힐문을 들으신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누가 건드리면, 맞받아치는 대신에 진리를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와 의인은 바리새인을 비유하고, 병든 자와 죄인은 세리와 죄인들을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건강한 자와 의인으로 인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그릇된 자부심과 자만심에 대해 책망을 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구원의 사랑이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뉴욕의 감옥에서 갓 나온 미결수 은행 강도와 소매치기가 같은 날 센츄럴 공원에 갔다가, 소매치기가 행인의 주머니 속에서 무엇인가를 훔쳤다. 아파트에 돌아가서 보니 성경의 쪽복음이었다. ‘재수 되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밤에 심심해서 그것을 읽어 나가다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읽게 됐다. 산상수훈을 읽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게 그만 말씀에 마음이 녹아졌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 이튿날, 소매치기는 함께 출감한 은행 강도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는, 읽어 보라고 권하면서 쪽복음을 주었다. 은행 강도는 어떤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던 참이었다. 그런 그는 받은 쪽복음을 주머니에 넣고는 잊어버리고 있다가, 자려고 옷을 벗는 중에 떨어진 쪽복음을 읽게 됐다. 옛 사람에게는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계속 읽어 나가다가 마태복음 11:28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를 읽는 순간에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오, 자비하신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주님께 나아갑니다.” 우리 주님 예수는 우리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하시고, 그 전파된 말씀을 통해 불신자들을 부르신다. 또한, 주님의 일에 무책임한 교인들을 부르신다.

금요일(5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께서는 모든 영혼이 당신의 나라에 부르심을 입어야 할 자임을 아셨다. 그분은 그들의 유익을 바라는 자로서 그들 가운데 행하심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셨다. 그분은 그들을 큰 거리에서, 개인의 집에서, 배 위에서, 회당에서, 호숫가에서, 그리고 혼인잔치에서 찾으셨다. 그분은 그들을 그들의 일상 일터에서 만나셨으며 그들의 세상사에도 관심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교훈을 가정으로 가지고 들어가셔서 그 가정 안에 있는 가족들로 당신의 신령한 임재의 감화를 받게 하셨다. 개인들에게 나타낸 그분의 강한 동정심이 심령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시대의 소망, 151).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된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치료봉사, 14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의분(義奮)이란 무엇입니까? 의분을 일으킬 만한 정당한 때와 그렇지 않은 때는 각각 언제입니까? 자신의 생각을 교과토의 시간에 나누십시오.

2. 예수께서 사회의 소외계층들과 관계를 맺으신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지침을 줍니까? 한편 어떤 조건 하에 죄인들과 섞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합니까? 예수께서 그러한 비난을 무릅쓰시고도 이러한 접촉을 가지신 사실은, 우리가 사회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려 할 때 어떤 지침이 됩니까?

3. 예수님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모본을 제시해 줍니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 그분의 행동을 그대로 따를 수 없습니까? 즉 우리가 문자 그대로 따르기 곤란한 부분으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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