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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내게로 오라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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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1-07-28 02:41 조회1,4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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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과 : 내게로 오라―->

                                                            (2021년7월31일 (안) 19시41분)

 

(7월25일 (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Q)~인간(人間)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수고(愁苦)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者)들이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마 11:28)초청(招請)하신다.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 질수 있는 비결(秘訣)의 핵심(核心)을 무엇인가? 

 

(A)~⑴ (다 내게로 오라)=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啓示)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죄인(罪人)들을 초대(初代)(invitation)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두고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만한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人間)을 친(親)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絶對的)인 권위(權威)를 가지시고 구원(救援)과 안식(安息)(rest)에의 초대(招待)를 하시고 계신 것이다. 

 

⑵.(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마지막 날의 영원(永遠)한 안식(安息)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의 모든 갈등(葛藤)을 해소(解消)한 후의 평화(平和)와 안식(安息)까지도 가리키고 있다. 즉 신자(信者)가 주(主)께로 가면 신자(信者)는 죄(罪)에서의 해방(解放)과 율법(律法)의 속박(束縛)에서의 해방(解放), 불안(不安)과 염려(念慮), 고통(苦痛)에서의 해방(解放)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⑶.즉(卽) 예수님께 오라는 초청(招請)은 어떤 집단(集團)이 아니라 개인적(個人的)으로 각자(各者)가 필요(必要)됨을 절실(切實)히 느껴 자의(自意)의 자유의지(自由意志)의 행동(行動)으로 자신의 모든 영육간(靈肉間)의 짐을 십자가(十字架) 밑에 내려놓았을 때 진정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7월26일 (월) <나의 멍에를 메고>

 

(Q)~(마태 11:29~30)에서 “멍에”는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며,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예수님에게서 배우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 

 

(A)~⑴.<멍에>= “우마(牛馬)”소와 말의 목에 얹어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기로 동물(動物)이 짐을 나를 때 더 무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해주려는 것이고, 짐 지는 일을 어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쉽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⑵.<나의 멍에를 메고>=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關係)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慣用的)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道具)로서 당시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勞役者)가 함께 메었는바, 결국(結局)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와 함께 메는 것임을 암시(暗示)하고 있으며, 

 

본문(本文)은 제자들의 영적(靈的)인 신앙생활(信仰生活)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表現)한 것으로서 예수는 제자(弟子)들에게 율법(律法)의 멍에를 메게 하지는 않지만 자신(自身)이 지고 있는 멍에를 질 것을 당부(當付)한다. 실로 율법(律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와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運命)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死亡)을 안겨다 주는 세상(世上)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方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提示)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人生) 질고(疾苦)를 극복(克服)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길이다.

 

⑶.<내 멍에”는 무엇인가?> = 

예수께서는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우리가 그분께로 가서 순종(順從)할 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지고 참된 쉼이 이르러 올 것이다. 완전(完全)한 굴복(순종)에 완전(完全)한 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복(順服)이다. 우리의 뜻은 하나님의 뜻 안에 스며들어야 한다. 

예수께 나아 올 때 우리에게 예수님 외에는 다른 도움이 없다는 결심(決心)이 따라야 한다. 

 

 ⑷.<“멍에를 메는 법(法)>

하나님의 손을 굳게 붙들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라. “나는 없는 것 같사오며 주님(主任)은 모든 것이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사오니 주여, 제가 주님 안에 있기 위해서 내 속에 주님을 모셔야 하겠사옵니다”. 라는 신앙(信仰)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믿음으로 한 발자국씩 전진(前進)하라. 이것이 그들의 멍에, 곧 순종(順從)의 멍에를 메는 방법(方法)이다(원고 85, 1901).”(주석, 마 11:29)

 

 (7월27일 (화) <나는 마음이 온유(溫柔)하고 겸손(謙遜)하니>

 

(Q)~성경(聖經)에서 온유(溫柔)한 사람으로 어느 어느 분이 나오며, 온유(溫柔)와 겸손(謙遜)의 결정체(結晶體)는 무엇이며 왜 중요(重要)한가?

 

(A)~⑴. ‘온유’란 외형적(外形的)인 폭력(暴力)이나 잔인(殘忍)함의 반대어(反對語)에 불과(不過)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積極的)인 사랑으로 인(因)하여 고통(苦痛)받고, 그 고통(苦痛)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忍耐)하는 온화(溫和)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仔細)인 것이다. (마 11:29, 약 3:13). 

 

 ⑵.성경(聖經)에서 온유(溫柔)한 사람으로 총27절(節)중에 28회(回)기록 하고 있으며, (민수기 12:3)에 처음으로 모세가 나오며 그 뜻은 “성질(性質)이 온화(溫和)하고 부드러움”을 뜻한다. 즉  ‘자기를 낮춤’, ‘괴롭힘을 당함’, ‘겸손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가 온유했다는 말은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에 대항치 않고 감정을 억제하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묵묵히 참아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편, 이 같은 자기 절제(節制)는 인간의 본성적(本性的) 기질(氣質)로는 불가능(不可能)하며, 오직 성령(聖靈)의 도움을 통해서만 가능(可能)하다.(갈 6:22-23).

 

 ⑶.그러나 모세를 능가(凌駕)하는 분으로 예수님의 온유(溫柔)와 겸손(謙遜)은 모세를 능가(凌駕)한다는 것이다. 즉 모세는 그의 백성(百姓)들을 구(求)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겠다고 했지만( 출애굽기 32:32) 그의 죽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 자신도 죄인(罪人)이었으므로 그 또한 자신의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救援)할 구원자(救援者)가 필요(必要)했기 때문이며 모세에게서는 구원(救援)을 찾을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擔當)하시어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어 우리를 구원(救援)할 수 있는 대속자(代贖者)이시기 때문이며 십자가(十字架)의 부활(復活)이 모세와의 엄청난 차이(差異)라는 점이다.

 

 ⑷.이 온유(溫柔)와 관용(寬容)은 그리스도의 성품(性稟)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自身)을 온유(溫柔)한 자로 소개(紹介)하셨을 뿐 아니라(마 11:29) 온유(溫柔)한 자가 복(福)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 5:5). 혹자(或者)는 예수에게 있어서 ‘온유(溫柔)함’은 이기적(利己的)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에서 생겨나는 힘으로 영적(靈的)인 차원(次元)의 것이라고 보았다.

 

⑸.예수님은 겸손(謙遜)과 온유(溫柔)로 중보사역(中保使役)의 대속자(代贖者)로서 구세주(救世主)가 되셔 우리가 구원(救援)을 얻게 되었고 “쉼‘의 주인(主人)이 되시기 때문이다.

 

 (7월28일 (수) <내 멍에는 쉽고>

 

(Q)~(마태 11:30)에서 “내 멍에는 쉽고”라는 말씀의 영적교훈(靈的敎訓)은 무엇인가?

 

(A)~⑴. “내 멍에는 쉽고” =‘쉽고’(헬, 크레스토스)란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解釋)된다.

 

⑵.예수를 따르는 것은 고난(苦難)의 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自己)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을 따르는 길이 고난(苦難)의 길임을 암시(暗示)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는 것인가.

 

⑶.여기서 한 가지 분명(分明)히 해야 할 것은 그 멍에가 내 멍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이며 그 짐은 내 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짐이라는 사실(事實)이다. 수고(愁苦)스럽고 무거운 내 멍에와 내 짐을 홀로 지고 고통(苦痛)당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을 지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그리스도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

 

⑷.우리의 구원(救援)은 율법(律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를 덮어 주심으로 인(因)해서 온전히 이루어 졌음을 이해(理解)하고 믿음으로 행(行)하는 순종(順從)을 통해 우리의 참된 ‘쉼“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7월29일 (목) <내 짐은 가벼움이라>

 

(Q)~(마태 11:30)의 “내 짐은 가벼움이라”는 영적교훈(靈的敎訓)은 어떤 것이며 또한 무엇인가?

 

(A)~⑴.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멍에는 고대(古代)로부터 복종(服從)의 표시(表示)였다.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는 예수의 뜻에 복종(服從)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죄를 용서(容恕)받게 하고 우리 죄의 무거운 짐을 벗겨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준다(요 8:36). 거기에는 영생(永生)의 약속(約束)이 있고 자원(自願)하는 사랑의 순종(順從)이 있다. 이런 측면(側面)에서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은 쉽고 가볍다.

 

⑵. <예수의 짐은>

(1)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2) 선(善)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3) 항상 예수의 능력(能力)에 의존(依存)하는 신앙(信仰)이 전제(前提)되기 때문에,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永生)을 동반(同伴)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 11:30, 만나주석)

 

 ⑶.<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리스도를 진정(眞情) 사랑하는 자는 그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할 것이다(참조 시 40:8 주석). 

주님께 순종(順從)하는 “멍에”를 메고, 그의 학교(學校)에서 “배우”려고 “오는” 자는 그가 약속(約束)한 마음의 “쉼”을 찾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功勞)를 통해 보장(保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노력(努力)으로 말미암는 공로(功勞)로 구원(救援)얻으려고 애쓰는 율법적(律法的) 의의(意義) 무거운 짐과 죄(罪) 자체(自體)의 훨씬 더 무거운 짐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마 11:30, 재림교주석)

 

⑷.<우리의 가장 무거운 짐은 죄(罪)의 짐이다.>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제거(除去)할 수 있는 죄(罪)의 짐에 억눌려 있다. 

죄(罪)로 말미암아 우리의 “온 머리는 병(病)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疲困)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傷)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痕迹)뿐”(사 1:5-6)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罪惡)을 그에게 담당(擔當)시키셨다”(사 53:6).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罪)짐을 지시고 우리의 고단한 어깨에서 짐을 가져가실 것이다. 

그리고 쉼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쉼에는 조건(條件)이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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