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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내게로 오라...(질문, 대답, 설명) 07/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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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7-24 01:55 조회2,6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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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내게로 오라...” 

(7월 3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1분)

 

 

연구 범위: 마 11:20~30, 마 5:5, 신 18:15, 갈 5:1, 출 18:13~22, 갈 6:2

 

기억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예수님의 귀한 약속을 발견한다. 우리 중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그분께서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잘 알고 계시며 우리가 허락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를 도우실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 후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너희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멍에와 부담들을 나에게 맡기고 내려놓아라. 그리고 너희가 지고 있는 것보다 더 쉽고 가벼운 나의 것을 지거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쉼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죄 이후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 3:19)라고 말씀하신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겁고 버거운 일들과 부담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예수님 앞으로 나와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 때 참된 쉼을 경험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 느끼기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한다.  

- 행하기

 예수님 안에서 경험한 자유와 행복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간다.

 

2.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찾기 위한 전제 조건은 무엇일까요?(마 11:28)

※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3.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의 참된 의미는 무엇입니까?(마 11:29~30)

※ 예수님의 협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4. 예수님의 삶에서 그분의 온유와 겸손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 봉사로 나타났다.

5. 바울이 이야기한 “종의 멍에”는 무엇을 의미할까요?(갈 5:1)

※ 죄의 종노릇 하는 것이다. 

6. 다른 사람의 짐을 진다는 것의 성경적 의미는 무엇인가요?(갈 6:2)

※ 수고를 나누어 담당하는 것이다. 

 

결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쉼을 약속해 주십니다. “오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여 그분 앞에 나와 우리의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같은 온유와 겸손의 삶을 통해 서로의 짐을 지며 사는 것이 참된 쉼을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7월 25일(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마 11:20~28을 읽어 보라.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러한 쉼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마11:20~28]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답: 예수님의 봉사와 기별을 많이 보고 들은 마을들이 예수께 나오지 않을 때 겪을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쉼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심판날에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맥락 없이 이런 말씀을 주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주어진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게 된다. 

 마태복음 11장은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의 전환점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맹렬히 비난하셨는데, 그것은 복음서에서 발견하게 되는 가장 가혹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돌려 말씀하지 않으시고 문제가 되는 것을 정확히 꼬집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마 9:9~13) 사람들과 어울리셨다.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불쾌하게 했다(마 9:1~8).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매우 강한 정죄의 말씀을 하셨다. 심지어 그들을 당시 그 어느 곳보다 악한 곳으로 알려져 있던 소돔에 비유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4).

 긴장이 고조되어 가고 있던 그때, 예수님께서는 상황을 전환 하시며 참된 쉼을 제안하신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는(마 11:27) 말씀 때문이었다. 참된 쉼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은 그분의 신성과 그분이 가지신 아버지와 하나 됨에 근거하고 있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우리의 짐들을 내려놓기 전에 우리 스스로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참된 형편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초청은 필요를 느끼는 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 11:28절에 기록된 “오라”는 말씀은 헬라어에서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오라”는 말씀은 참된 쉼을 찾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오라”는 자기 삶을 스스로 좌지우지하려는 의지를 내려놓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과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결심을 통해 예수님 앞으로 ‘나와’, 그분 앞에 다 내려놓기로 선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삶에 있어서 자유 의지가 그렇게도 중요함을 실제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묵상>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결심은 무엇인가요?

 

답: 주님께 나아와서 자아를 내려놓고 굴복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환자는 병이 완전히 낫기 전에는 쉼이 없다. 누워있어도 쉼이 되지 않는다. 아담 안에서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을 받아 출생한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사망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환자가 자각증상(自覺症狀)이 없으면 치료할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신을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자각증상이 없기 때문에 늦게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는 기간을 넘긴 사람들은 죽는 날을 기다리며 쉼이 없는 고통으로 나날을 보낸다. 아픈 곳의 통증뿐만 아니라 마음의 통증도 크다. 기회를 놓친 후회가 의식을 괴롭힌다. 결국은 사망이다. 사람들은 죽는 것이 자연현상이라서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운명이라고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쉼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열심히 외치시는 것이다. 그분은 이 사망의 불치병을 완쾌시킬 수 있는 생명의 의원이시다. 이 생명이 확보되면 쉼이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다. 부활의 소망이 쉼이 된다. 이 복된 치료의 기별을 행동으로 설교로 그렇게 자주 많이 말했으나 말씀하신 고을들이 듣지 않으니 이제 그 결과를 강하게 분명하게 발표하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예수님께 나오면 치료받을 수 있고 참된 쉼을 누릴 수 있다고 하신다. 오늘날도 똑같다.

  

<교훈>

“오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에 개인적으로 반응하여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모든 짐을 내려놓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쉼을 경험할 수 있다. 

 

 

7월 26일(월) “나의 멍에를 메고”

 

 마 11:29, 30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그분께 드리고 참된 쉼을 경험하라고 우리를 초청하자마자 다시 우리에게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께 오면 죄와 사망의 짐은 벗겨지고 생명의 활력을 얻어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게 되며 그것을 열심히 배워서 다른 사람에게도 이 생명을 살도록 증거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마 11:28의 ‘오라’는 명령 이후에 마 11:29에서 두 가지 명령이 더 등장한다. ‘메고’와 ‘배우라’는 명령은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한다. 우리는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에게서 배워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는 본문에 나타난 멍에라는 비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아버지와 아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연합하여 일하신다. 멍에는 ‘순종’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참조, 렘 27), 연합된 목적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로도 사용된다. 우리는 그분의 멍에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을 복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그분의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분께 매여질 뿐이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마 11:30).

 “내게 배우라”는 두 번째 명령은, 이 개념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헬라어에서 ‘배우다’라는 동사는 ‘제자’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때. 우리는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된다. 제자도의 특징은 순종과 헌신이다.

 

 “무거운 짐”(마 11:28)에 눌려 있는 것과 그분의 멍에를 메는 것(마 11:29)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답: 무거운 짐은 사망의 짐이다. 예수님의 멍에는 생명의 활동하는 삶이다. 

 

 유대교에서 멍에는 율법을 설명하기 위한 일반적인 비유였다. 행 15:10에서는 같은 단어를 할례법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 갈 5:1에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구원의 수단으로써의 율법을 나타내는 종의 멍에를 대조한다. 예수님께 매인다는 것은 그분의 발자국을 따르며 그분의 사명에 참여하는 순종과 헌신을 강조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지만, 그분의 대사가 되어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나눌 수는 있다. 

 산상수훈에 나타난(마 5~7)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예수께서는 무거운 짐에 짓눌린 굳은 마음을 들어내고, 새로운 동기와 생명으로 살아 숨 쉬는 새 마음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마 11:30).

 

<묵상>

나의 삶을 짓누르는 멍에를 내려놓고 예수님께 매여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기쁨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답: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멍에는 살려주는 멍에이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은 사망의 짐이다. 그것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나타내는 상태이다. 아무리 애써도 이 짐을 벗을 수 없다. 썩어져가는 옛 사람이 우리를 끌고 사망으로 달리는데 그것을 대항할 힘이 없다. 난치병 환자가 치료하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찾아가고 싶어 하는가? 살 방도가 있다면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수고이다. 그 자체가 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냥 나와서 그분 손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그분은 값없이 돈없이 치료해주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다. 그리고 새 생명의 활력으로 다른 사망에 매인 사람들에게 예수께 와서 생명을 얻으라고 전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다. 그것을 확실히 배우는 것이 진리를 배우고 깨닫는 길이다. 우리는 이 생명을 가졌는지 자주 물어보자. 그래서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 기쁨을 누리자. 그것은 쉽고 가벼운 짐일뿐 아니라 즐거운 짐이다. 그래서 수고가 되지 않는 짐이다. 

 

<교훈>

우리의 멍에를 내려놓고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매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7월 27일(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 5:5, 벧전 3:4, 사 57:15을 읽어 보라. 그대는 이 말씀들에 근거하여 온유함과 겸손함을 어떻게 정의하겠는가?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벧전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사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답: 오유와 겸손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복하는 존개가 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고후 10:1에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에 대하여 말한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만만하다거나 유약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표현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분의 사명을 다하지 않았음을 아셨기 때문에 그분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직접 맞서 싸우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런 자리를 자주 피하셨다(요 4:1~3).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에는 반대하는 자들을 담대하게 마주하셨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친절히 말씀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셨을 때에도 그 성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 다가올 처참한 미래를 내다보시며 눈물 가득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신 것이었다(눅 19:41~44). 

 신약에서 예수님은 종종 두 번째 모세로 묘사되고 있다. 그분은 산 위에서 그분의 나라의 원칙들에 대하여 말씀하셨고(마 5:1) 많은 군중들에게 기적의 음식을 주셨다(마 14:13~21). 민 12:3은 모세를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마 11:29에 메아리치고 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놀라서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신 18:15에서 모세를 선지자로 묘사하고 있는 모습과 연결된다.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함은 분명 모세를 능가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모세가 그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겠다고 했지만(출 32:32), 그의 죽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세 자신도 죄인이었으므로 그 또한 자신의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모세와 그의 삶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그에게서 구원을 찾을 수는 없다.

 우리는 단순히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대속물로서 우리를 위해 설 수 있는 구원자를 필요로 한다. 중보 사역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죗값을 지불할 하나님이 필요하다. 죄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법적 책임을 해결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대속자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훌륭한 모본이 되신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와 부활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묵상>

우리에게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결정체인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이는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길이 없다. 

 

 <부가설명> 성경은 온유와 겸손에 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자가 겸손한 자이다. 겸손을 온유의 근본이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다. 겸손하지 않으면 온유가 생활이 되지 않는다. 겸손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삶이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정신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의 해석을 달지 않는다. 그는 말씀대로 살려고 굴복한다. 쉽게 순종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순종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으면 순종은 지체로서 기능을 다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주님께 하게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손은 머리, 뇌가 시키는 대로 활동할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다. 모든 지체가 건강하게 제 기능을 다할 때 온 몸이 건강하게 된다. 몸에 붙어서 제기능을 다 할 수 있는 상태가 온유와 겸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제 기능을 다 수행하는가? 

 

<교훈>

모세의 것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으며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다. 

 

 

7월 28일(수) “내 멍에는 쉽고”

 

 우리는 마태가 본문에서 “멍에”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당시 유대교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던 의미를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신약 성경에서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나타낼 때 이 단어를 사용했음을 앞에서 공부하였다. 

 

 마 11:30에서 “쉽고”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선한, 유쾌한, 유용한, 자애로운”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거운 것, 지키기 어려운 것, 그리고 심지어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율법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도울 수 있겠는가?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이 주신 멍에는 쉽고 가볍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가 첫걸음을 떼던 순간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 기우뚱거리는 첫걸음이 주춤대는 두 번째 발걸음으로 이어지고 세 번째 발걸음을 내디딜 즈음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게 될 것이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을 것이고 넘어져서 멍이 드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서 걷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되면, 이내 다시 일어나서 다시 시도할 것이다. 걷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서 걷다 다시 넘어지고 또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게 된다. 안전하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시도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반복된 연습 끝에 마침내 아이는 혼자 걸을 수 있게 되고 기분 좋은 모습으로 외치게 된다. “아빠, 엄마, 저 이제 걸을 수 있어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며 옳은 일이다. 흔들릴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서서 언제나 우리 옆에 계시는 그분과 함께 걸을 수 있다. 

 

 갈 5:1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메라고 하시는 멍에와 바울이 경고하는 “종의 멍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답: 종의 멍에는 종으로 부리기 위하여 조종하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사탄의 조종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어떤 의미로 “종의 멍에”를 언급했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 곧 십계명에 대한 순종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우리의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덮어주심으로 인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을 통해, 우리는 참된 쉼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묵상>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율법에 불순종하며 사는 것보다 더 완전한 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율법은 멍에가 아니라 사람이 생명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성경의 복음을 바르게 깨닫기 위하여서는 인류의 상태를 전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절대로 중요하다. 그것은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한 사람들은 사망의 상태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존재(롬8:21),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엡4:22)이라고 계시하였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스스로 수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하든지 율법으로 옳든지 다 썩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과 사망에 관하여 바른 이해가 없으면 사망에 속하여서 도덕적 선을 행하는 것을 의라고 착각한다. 그것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의 복음으로는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오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을 처리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신(딤후1:10) 그 생명을 얻는다. 생명을 얻었으면 생활하게 된다. 생명의 활동으로 생활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이다. 바울은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갈2:20). 그들이 걸어가는 그 생명의 길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다. 이것은 생명 있는 사람만 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다. 참된 자유는 영원한 생명의 본성이다. 

 

<교훈>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참된 쉼을 경험할 수 있다. 

 

 

7월 29일(목)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30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짐을 지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모세는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후 장인 이드로를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웠다. 출 18:13~22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에서 다른 사람의 짐을 진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출18:13~22]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14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15 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16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17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18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19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20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21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22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

 

답: 협력하여 일을 분담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출 18:13은 백성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재판을 받기 위해 모세에게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장인이 이 모습을 보았을 때, 모세 자신은 보다 더 큰 일에 집중하고 그를 돕는 사람들이 사소한 문제들을 책임지도록 일을 맡기는 구조를 만들라고 사위에게 진지하게 조언해 주었다. 성경은 모세가 이드로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고 마침내 그의 바쁜 삶에 숨통을 트이게 하는 그 변화를 시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가 모든 이들의 짐을 져 주실 수 있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음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짐을 나누어 지기 위해 서로가 필요함을 배워야 한다. 고전 12:12~26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몸은,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된다. 어떠한 무게라 할지라도 그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들기 위해서는 다리와 팔과 어깨와 근육 그리고 힘줄이 필요한 것이다. 

 

 갈 6:2을 읽어 보라.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가?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답: 다른 사람을 도와서 그의 삶을 예수님 안에서 가볍고 즐겁도록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의 문맥을 살피는 것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갈 6:1에서 바울은 만약 형제나 자매가 죄의 유혹에 빠지면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말한다. 

 서로의 짐을 진다는 것은 누군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그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회복시켜서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누군가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로 ‘짐’이라는 단어는 무거운 무게를 가진 무엇 또는 돌을 가리키기도 한다. 본문의 말씀은 누구나 짐을 지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그 짐을 함께 져 줄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함을 기억하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서로 짐을 나누어 지라고 명령하셨다. 온유함으로 그 일을 행하면 참된 사랑을 낳을 것이다.

 

<묵상>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공동체의 공동목표를 예수님 안에서 협력하여 성취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계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머리라고 가르친다. 몸은 머리의 지시로 각각 맡은 기능을 수행한다. 신경 줄이 끊어지면 머리가 지시하는 것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지체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다른 지체들에게 지장을 준다. 몸은 목표를 향해 모든 지체들이 목표를 성취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한다. 암세포는 이것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다른 세포들이 일을 못하도록 하고 암세포가 되게 한다. 그것은 몸 전체를 망가뜨리는 일이 된다. 암을 치료하지 않으면 몸은 결국 모든 기능을 정지하게 된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교회도 유기적인 공동체이다. 사탄은 이런 교회에 암세포를 심는다. 세포이기 때문에 같은 목표로 일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기 일하는 세포를 방해하고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교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즐겁게 협력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생명력이다. 

 

<교훈>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짐을 져 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7월 3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대가 그대의 일이 힘겹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대가 고난과 시련을 불평할 때, 그대가 유혹에 대항할 힘이 없고 성급한 것을 이길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 생활은 어려운 사업이라고 말하는 때 그대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인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엘렌 G. 화잇, 새 자녀 지도법, 267).

 

 “끊임없는 경계와 열렬하고 사랑스러운 헌신을 할 필요가 있기는 하나 이것들은 영혼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받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거룩한 은총을 얻기 위하여 결단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선한 행실을 전혀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고 죄 있는 존재로서 그리스도께 나올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공로를 전적으로 믿고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받으실 것이다. 저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용솟음칠 것이다. 거기에는 환상적인 감각이 없을 것이며 다만 영속적이며 평화스러운 신뢰심이 있을 따름이다. 모든 짐은 가볍다. 그리스도께서 메워주시는 멍에는 쉽기 때문이다.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유쾌한 것이 될 것이다. 흑암에 싸인듯이 보였던 길은 의의 태양이신 주님께서 비취는 빛으로 말미암아 밝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빛 가운데서 행하는 생애이다”(엘렌 G. 화잇, 믿음과 행함, 38, 3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그분께 온전히 굴복하기로 결심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해 그대의 경험을 나눠 보라. 

※ 각각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2. 마 11:25~27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공부한 후 어떻게 하면 은혜로 허락하시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 토의해 보라.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 어린아이는 지식에 관하여서는 저기 고집이 없다. 

 

3.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져야 하는 인생의 짐으로 인해 힘겨워하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겠는가?

※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을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주면서 말씀의 진리를 깨닫록 사랑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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