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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상상할수 없는 일을 행하심-(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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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1-03-02 17:33 조회1,6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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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상상(想像)할 수 없는 일을 행(行)하심

 

(2월 28일(일) <시험(試驗)하는 진리(眞理) (사 50:4~10)>
(Q)~(이사야 50장)에는 인간의 지혜를 버리라는 도전의 말씀이 전개되어있다. 즉 진리는 시험을 받아도 변하지 않음을 어떻게 예언되었고 성취되었는가?


(A)~선지자께서 예언하시기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아께서 종으로 오심을 말씀하셨는데 구원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모욕과 학대와 수치를 당하셨지만 보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시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시는 분에 대하여 선지자는 말씀하시며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 종으로 오시는 분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분의 이름을 의뢰하고 의지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즉 진리는 어떠한 시련이나 시험이 따라도 변하지 않음을 입증하시고 있다.

 

(3월 1일(월) <고난(苦難)받는 종의 시(詩) (사 52:13~53:12)>
(Q)~죄에 빠져 길을 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노력의 정수를 보여주는 짧지만 심오한 의미로 압축되어진 (이사야 52:13~53:12)의 “고난(苦難)받는 종의 시(詩)”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A)~○. (이사야 52:13~53:12) <메시아의 고난(苦難)과 승리(勝利)의 의미(意味)>
(1). 메시아의 고난(苦難)을 통한 역설적(逆說的) 승리를 서론적(序論的)으로 언급(言及)한다. (이사야 52:13~15)
(2). 메시아께서 외면(外面)당하시고 거절(拒絶)당하심. (이사야 53:1)
(3). 메시아의 겸손(謙遜)하심과 스스로 비천(卑賤)해지시고 나아가 인간의 멸시천대(蔑視賤待)를 받으심. (이사야 53 : 2~3).
(4). 메시아의 눈물겨운 수난(受難)장면 묘사(描寫)와 수난(受難)에 임하는 ‘종’의 자세(姿勢). (이사야 53:4~9)
(5). 메시아 수난(受難)의 결과(結果)로 하나님이 주신 승리(勝利). (이사야 53:10~12)
 한편 예수께서 이처럼 비천(卑賤)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하나님 자신이 먼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채우시기 위하여 죽음을 자처(自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수난(受難)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尊嚴性)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保障)해 주시면서 하나님 공의(公義)의 법(法)을 또한 보존(保存)하신 것이다

 

(3월 2일(화) <누가 믿었느냐? (사 52:13~53:12)>
(Q)~(사 52:13~53:12)에서 무죄(無罪)한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代身)하여 고통(苦痛)당한다는 사상(思想)이 나타나 있는 데 왜 죄인들은 고난의 ‘종’을 믿지 않았는가? 여기에 우리를 위한 어떤 핵심적인 기별이 있는가?


(A)~우리가 보기에 인간 심령(心靈) 내부(內部)를 판별(判別)할 수 없는 인간 눈의 제한성(制限性)이 첨예(尖銳)하게 드러난 부분이다. 우리는 육신(肉身)의 안목(眼目)에 메이지 말고 (요일 2:16) 마음의 눈으로 영적진리(靈的眞理)를 판별(判別)해 낼 수 있는 능력(能力)을 키워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1:18).
하나님의 진리(眞理)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혀에 의해서 얼마든지 요리(料理)되는 추상적(抽象的) 사변(思辨)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보다 먼저 살아 계셨고 또 살아 계시고 또 살아계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진리(眞理)로서 끝내는 그 진리에(眞理) 의하여 우리가 심판(審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3:16 절)이 일을 잘 압축(壓縮)하고 있는바 이 모든 과정(過程)에서 하나님은 오직 사랑으로 이 모든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3:9절; 로마서 4:25 절; 롬 6:3~5절)
 이렇게 볼 때 성경의 독특(獨特)한 ‘종’의 고난(苦難)과 영광(榮光)의 연계성(連繫性)은 단순(單純)한 감동(感動)을 위한 역설적(逆說的)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유일(唯一)한 방법으로서 논리적(論理的) 필연성(必然性)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논리적(論理的) 필연성(必然性)을 수행(遂行)할 의무(義務)나 책임(責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 고통(苦痛)스러운 방법을 취(取)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종’의 영광은 잔인(殘忍)한 정복자(征服者)의 영광(榮光)이 아니라 정의(定義)와 진리(眞理)와 사랑의 이룩한 순결(純潔)한 영광(榮光)인 것이다

 

(3월 3일(수) <구제(救濟)할 수 없는 자(者)들은 바로 우리 (사 53:3~9)>
(Q)~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죄(罪)의 저주(詛呪)를 받고 고난(苦難)을 겪도록 허락(許諾)된 이유는?


(A)~(1) 우리 주 예수는 우리 죄를 속죄(贖罪)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형벌(刑罰) 결과로부터 구원(救援)하도록 지정(指定)되셨고 또 그 일들을 착수(着手)하셨다.
① 그는 자기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것을 행하도록 지명되었다. 즉,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어 불쌍한 죄인들의 구조(救主)가 되게 하셨고 그로 하여금 이 방법으로 그들의 죄와 그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케 만드시고자 했다.
② 어떤 방법(方法)으로 우리는 우리가 죄로 인해 겪어야 할 멸망(滅亡)으로부터 구원(救援)되는가?
그것은 제물(祭物)을 바치는 자의 죄가 그 제물 위에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죄가 속죄를 위한 염소의 머리 위에 부과되었던 것같이,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놓음으로써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죄(즉, 속죄를 위한 제물)가 되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의로써 율법에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악은 그리스도께 놓여졌다. 이처럼 그는 죄짐에 무겁데 눌려 그에게로 오는 자들을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계셨다.(시40:6-12. 참조)
③ 누구에 의해 이것이 정해졌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게 하신 여호와였다.
그가 이러한 화해와 구원의 방법을 고안해 내셨고 그리스도가 이루셔야 했단 그 대속(代贖)을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단호한 뜻과 예지에 의해서” 사망에게 넘겨졌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가 지게 하실 권세를 갖고 계셨다. 그것은 죄가 그를 거슬러 범해젔고 그에 대해 또한 속죄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며, 죄악을 담당해야 할 그리스도는 그의 아들 즉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무죄하신 그의 거룩한 자손 예수였기 때문이다.
④ 누구를 위해 이 속죄(贖罪)가 행해져야 했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지신 것은 “우리 모두의 죄”(의 대속물(代贖物)였다)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사람을 구원(救援)할 수 있는 공로가 충분히 있으며, 그에게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진정한 예물이 있다. 그것은 이것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암시한다. 의롭게 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게 둠으로써 의롭게 되며, 비록 그가 죄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리스도는 그 모든 짐을 감당하실 수 있다.
⑤ 오직 구제(救濟)받을 가망(可望)이 없는 우리를 구원(救援)하여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3월 4일(목) <우리를 변화(變化)시키는 속건제물(贖愆祭物) (사 53:10~12)>
(Q)~그 ‘종’의 생명이 ‘속건제물(贖愆祭物)’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意味)인가? (사 53:10)


(A)~① 속건제(贖愆祭)는 속죄제(贖罪祭)와 거의 같은 제사(祭祀)이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속건제(贖愆祭)는 성물(聖物)이 난 남의 물건(物件)을 침해(侵害)하거나 손해(損害)를 입혔을 때 드리는 제사로써 용서(容恕)를 위하여 희생(犧牲) 제사(祭祀)를 드림은 물론 그 침해(侵害)한 물건(物件)을 도로 갚아 주어야 하며 거기에다가 오분의 일의 값을 더 얹어서 주게 되어 있었다.
② 이사야 5310) 이처럼 속죄제(贖罪祭)와 속건제(贖愆祭)를 구분(區分)하여 다루는 까닭은 두 제사(祭祀)의 특성(特性)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前字)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경우에 드려지는 제사(祭祀)이며 배상(賠償)의 성격(性格)보다는 단순한 속죄(贖罪)의 성격(性格)이 강하다. 후자(後字)는 주로 하나님의 권위(權威)나 또는 이웃의 권리(權利)를 침해(侵害)하였을 때 드리는 제사로서 배상(賠償)의 성격이 전자(前字)보다 뚜렷하다.
(레위기 5:14∼6절)의 이면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전자(前字)는 용서(容恕)라는 의미(意味)가 있는 반면 후자(後字)는 만족(滿足)이라는 의미(意味)가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처럼 의미가 다른 속건제물로서의 그리스도와 속죄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연속되는 시절을 통하여 동시에 언급하는 까닭은 메시아가 두 가지 역할을 다 감당해야 완전한 구 원(救援)사역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속건제물로 드려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익을 만족시키게 되었으며 속죄 제물로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약(要約)>
이사야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救援者)의 탄생(誕生)과 신원(身元)과 사역(使役)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마침내 우리에게 소망(所望)을 안겨준 가장 큰 비극적(悲劇的)인 사건(事件)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길을 잃고 방황(彷徨)하며 구제(救濟)하기 어려운, 우리 같은 자들을 구(求)하시기 위해서 자원(自願)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苦難)과 형벌(刑罰)을 짊어지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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