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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존귀한 평강의 왕(질문, 대답, 설명) 01/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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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1-23 05:19 조회3,4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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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존귀한 평강의 왕

 

1월 30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54분

 

● 연구 범위 : 사 9:1~7, 9:8~10:34, 11장, 12:1~6

 

● 기억절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원자폭탄을 처음 만들 때에 그 일을 지휘했던 오펜하이머 박사가 미국 의회 국방위원회 앞에 섰다. 의원들이 그 무기를 막을 방어책이 있는지 묻자, 그는 ‘분명히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기대에 찬 모습으로 침묵하고 있는 청중을 바라보던 오펜하이머 박사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평화입니다.’”—Paul Lee Tan, Encyclopedia of 7,000 Illustrations: Signs of the Times (Rockville, MD: Assurance Publishers, 1985), p. 989.

인류에게 평화는 이루기 어려운 꿈이다. 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평화가 유지되었던 시기는 모든 시대의 약 8퍼센트에 불과하며 그동안 파기된 조약은 최소 8천 개에 이른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1895년에 세계 평화에 두드러진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상을 제정하기 위해 재산을 기탁했다. 그러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람들 중에 폭력적인 투쟁에 가담한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주에 참되고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그분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 우리를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하게 여긴다.

행하기 : 주님이 가져다주실 완전한 구원과 평화를 소망하며 그 뜻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의 도구로 드린다.

 

➋ 갈릴리 땅이 영화롭게 되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어두운 세상에 어떤 희망을 불러일으킵니까?(사 9:1)

※ 빛을 비추어서 구원의 소망을 일깨운다. 

➌ 메시아의 정체는 어떻게 다양한 언어로 묘사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사 9:6)

※ 기묘,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그분은 구주시면 통치자시며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➍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사 10:20~21)

※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생명을 얻으라는 사랑의 권고이다. 

➎ 하나님은 인간뿐 아니라 지구의 전체 생태계에 대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까?(사 11장)

※ 화평과 공존의 목적이다.

➏ 그분의 목적이 완전하게 실현될 때까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그분의 계시를 선입견을 가지고 이해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말씀이신 그분의 성육신과 구원을 놓쳐버리고 그분에 대한 우리 나름대로의 해석에 집착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거기에 영생과 영멸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월 24일(일) 갈릴리에서 불행이 끝남 (사 9:1~5)

 

“그러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둠은 이제 사라졌다. 전에는 그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모욕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지만, 이후로는 바닷길과 요단 강 저편의 땅과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를 영광스럽게 하셨다”(사 9:1, 우리말성경).

 

1. 사 9:1이 이사야 8장의 분위기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를 것임을 암시하는 단어인 ‘그러나’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답: (원문은 ‘키’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그러나, 또는 그래서, 그러므로 등등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개역이나 개정판에서는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다.) 이제는 구원의 빛이 비쳐서 영광스럽게 되는 일을 계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8:21~22은 참하나님 대신 이교 신앙으로 향하는 자들의 절망적인 상태에 대해 묘사한다. 그들이 어디를 바라보든지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사 8:22)갔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사 9:1)는 때가 올 것이었다. 여기서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큰 빛”(2절)이라는 특별한 복을 받는 자들로 부각된다. 하나님이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기 때문에(4절) 이 민족은 번성하고 행복할 것이었다.

갈릴리 호수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 중에서 제일 먼저 정복된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되었다. 아하스의 지원 요청에 따라 디글랏 빌레셀 3세가 북방 이스라엘의 갈릴리 지역과 요단강 동쪽 지역을 취하고, 사람들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 다음, 그 영토를 앗수르의 도(道)로 예속시켰다(왕하 15:29). 그래서 이사야는 가장 먼저 정복된 지역이 가장 먼저 구원을 볼 것이라는 기별을 선포했다.

 

2.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누구를 사용하실 예정인가?(사 9:6~7)

[사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답: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신 분이 아들 아기로 우리에게 주신 바되어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3. 사 9:1~5의 예언은 언제 어떻게 성취되는가?(마 4:12~25 참고)

[사9:1~5]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마4:12~25]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답: 예수께서 오셔서 갈릴리 봉사를 시작하시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우연찮게도 예수님의 초기 봉사는 갈릴리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그분은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렸던 자들을 건지시며 백성들을 치유하심으로써 희망을 안겨 주셨다(마 4:24). 여기서 우리는 구약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 신약에 일어날 사건의 예표로 사용된 전형적인 예를 본다. 하나님은 한 시대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을 다른 시대의 이미지들과 합성하신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기원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종말에 벌어질 세상의 멸망과 겹쳐 놓으셨다.

 

<부가설명> 우리교회 복음조화에 따르면 예수님의 초기 봉사는 유다지방 봉사다. 침례요한이 잡히기 전까지는 유다 지방에서 봉사하시고 침례요한이 잡힌 소식을 들으신 후에 갈릴리 지방으로 가셨다. 그러므로 3년반 공중 봉사에서 첫 1년은 주로 유다 지방에서 봉사하시고 다음 2년부터는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봉사하셨다. 공관복음은 유다 지방 봉사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유다 지방 봉사를 주로 기록하고 갈릴리 지방 봉사는 별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 복음서를 다 읽어서 예수님 봉사를 확인해야 한다. 아무튼, 공관복음인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봉사가 갈릴리 지방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갈릴리 지방에서 봉사하시는 것은 바로 이사야 9장에 예언된 그 말씀의 성취이다. 구약성경의 예언과 사건들은 그 속에 예수께서 구원봉사를 하시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이사야 예언의 시대적 상황을 아는 것은 중요하고 유의해야 할 사항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면 예언이 모든 시대에 복음으로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예언은 복음으로 예수님과 연결하여 이해할 때 그것이 유대인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인류를 위한 복음의 기별이 될 것이다. 

 

교훈 :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전쟁과 포로와 고난을 경험한 민족들이 마침내 메시아의 출현으로 구원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1월 25일(월) 우리를 위한 아들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1. 이사야서를 보면 임마누엘과 마헬살랄하스바스에 이은 세 번째 특별한 출생이 있다. 사 9:6~7에 나오는 이 아기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사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답: 그는 본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며 기묘자, 모사, 평강의 왕이시다.

 

이 구원자는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왕이나 신들은 그들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은 “기묘자”인데, 이는 여호와의 사자가 삼손의 아버지에게 소개했던 이름과 같다(삿 13:18, 히브리어의 어근이 같음). 그런데 그가 마노아의 단에서 불꽃 가운데로 좇아 하늘로 올라간 것은, 1,000년도 훨씬 지난 이후에 있을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한 것이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신성을 가지셨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영원한 창조주가 되신다(눅 3:38에서 아담의 위는 하나님이라고 했음). 그분은 다윗 왕조의 왕이시며, 그분의 왕국은 영원할 것이다.

 

2. 주어진 속성들에 비추어 볼 때, 누구만이 이 아기가 될 수 있는가?(눅 2:8~14 참고)

[눅2:8~14]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답: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어떤 이들은 이 아기를 히스기야 왕과 동일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여기에 묘사된 내용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오직 한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창조주(요 1:1~3, 14, 골 1:5~17, 2:9, 히 1:2)이시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설명에 적합하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28:18~20). 그분은 신성을 지니시면서 또한 영원히 인간이 되셨는데, 이는 항상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기 위함이었다(히 4:15). 그런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세상에 오셨을 때에 사탄은 이미 이 땅 위에 있었고 말구유에서 갈보리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걸으신 행로의 매 발자국마다 그는 논박하였다. 사탄은 천사들에게 극기의 정신을 요구하신 하나님을 비난하였다. 사탄이 비난하는 것의 요점은 하나님 자신이 극기에 대한 뜻을 모르며 당신 자신이 남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키는 일이 없으면서 어떻게 천사들에게 극기의 정신을 요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탄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비난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406~407).

 

<부가설명> 이사야 9:6절은 우리에게 아들 아기로 보내신 분의 근본적인 신분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고 있다. 그분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에 예언적으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1,2). 이렇게 기록했다. 그분은 빌립보서에 기록된 대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근본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런 분이 아담의 후손들을 사망에서 건져내어 생명에 이르게 하시려고 생명 자체이신 분이 아담의 사망을 대신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그분이 구주이심을 증명하셨다. 우리는 그분을 믿어서 우리도 부활의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의 아들 신분을 얻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범죄한 이후,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역사의 모든 페이지마다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한 아기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1월 26일(화) 진노의 막대기 (사 9:8~10:34)

 

사 9:1~5은 이교를 신봉하고 정복과 압제의 덫에 빠져 낙담하며 고뇌하는 백성을 위한 구원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사 9:4).

1. 사 9:8~10:34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들을 읽어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레 26:14~39에 나오는 저주들과 비교해보라. 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단번에 벌하지 않으시고 단계적으로 벌하시는가? 이것은 그분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가?

 

답: (각 사람이 읽어보기 바란다. 여기에 옮기기에 너무 길다.) 하나님께서 단계적으로 벌하시는 것은 그들이 돌이켜서 돌아오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절실한 사랑의 마음을 드러낸다.

 

만일 하나님이 유다의 멸망을 원하셨다면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지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벧후 3:9)신다. 하나님이 사사 시대에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어리석음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맛보게 하셨으므로, 그들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깨달아야 했다. 그들이 악을 고집하고 자신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할 때마다 그분은 보호의 손길을 조금씩 거두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반역하였다. 이 악순환은 하나님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을 때까지 반복되었다.

 

2. 사 9:8~10:2을 읽어보라. 백성들은 어떤 죄들에 대해 책임이 있었는가? 그것들은 누구에 대한 죄였는가?

[사9:8~10:2]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10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모두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13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1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15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17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18 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19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20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10:1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2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답: 하나님의 징책에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죄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길이 분명해도 그들 스스로 그 길로 오기를 거절하였다. 저자는 이것을 자유의지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자유의지의 실상을 본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잘못된 선택을 할 자유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몇 번이고 그분의 사랑과 성품을 나타내시며 호소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시련과 고통과 혼돈과 두려움 등 잘못된 결정의 결과를 맛보게 하시는 것은 그분에게서 등을 돌린 결과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자유의지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기 마련이다.

 

<부가설명> 만일 진짜 자유의지라면 잘못 사용했다는 표현은 맞는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자유로 선택한 결과를 받는 것일 뿐이다. 자기가 자유로 선택했는데 어떤 표준으로 잘못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의 생각은 선택은 하나님께 있고 반응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과 사망의 길을 우리 앞에 두셨다. 하나님께서 두지 않은 것을 우리가 선택해서 생명의 길을 만들고 사망의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생명의 길만 두셨다. 아담은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뱀이 그들을 유혹했고 유혹을 받아들임으로 생명을 잃고 사망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지 않은 길로 떨어졌다. 이제 아담의 자손들은 무조건 사망의 존재로 태어난다. 아무도 생명과 사망 중에 사망을 자유로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이 없다. 결정된 운명으로 사망으로 태어나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해주셨다. 이것도 사람의 자유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에 반응하여 생명을 받아들이면 생명을 얻고 거절하면 그가 이미 처하여 있는 사망의 결과를 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부디 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라고 그렇게 간절히 권하신다. 징계하시면서, 형벌을 가하시면서 사망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생명으로 오라고 강권하신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대로 두시고 결과는 사망으로 종결되는 것일 뿐이다. 생명을 받아들이면 산 자의 땅에서 산자의 하나님과 함께 행복한 중에 영생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이 징계의 막대기를 드시는 것은 계속 자비의 음성을 거절하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돌아서도록 끝까지 호소하고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1월 27일(수) 뿌리와 한 가지 (이사야 11장)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1. “이새의 줄기(그루터기)”에서 나는 “싹”은 누구인가?(사 11:1; 슥 3:8, 6:12 참고).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슥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슥6: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답: 예수님이시다.

 

사 11:1은 사 10:33~34에 나오는 찍혀 넘어진 나무를 비유로 든다. ‘이새의 그루터기’는 이새의 아들인 다윗 왕조가 세력을 잃을 것임을 가리킨다(단 4:10~17, 20~26 참고). 그러나 죽게 된 ‘그루터기’에서 ‘싹’ 또는 ‘가지’가 날 것인데, 이는 다윗의 계보를 이을 통치자를 말한다.

 

2. 사 11:10에서는 왜 다윗 왕조의 새로운 통치자를 또 “이새의 뿌리”라고 했는가? 어떻게 그가 싹이면서 동시에 뿌리일 수 있는가?(계 22:16 참고).

[사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답: 예수님은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르신 창조주이신데 세상에 구주로 탄생하실 때 이새의 혈통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 묘사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계 22: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어울린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눅 3:23~31), 다윗은 아담의 자손이며,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눅 3:38)인데,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다윗을 창조하셨다(참조 요 1:1~3, 14).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조상이시며 또한 그의 자손이시다!

 

3. 다윗 왕조의 새로운 통치자는 어떤 방법으로 죄와 반역의 악한 결과들을 뒤집는가?(사 11장).

[사11:1~16]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2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13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14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15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답: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실 것이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생각과 행동에 일치한다. 그는 공정하게 판단하고, 악한 자들을 벌하며 평화를 가져온다. 그가 권세를 받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회복시키시고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다(사 10:20~22 비교). 그때 블레셋과 다른 민족들을 정복했던 다윗 왕의 시대처럼 강한 통일 왕국이 수립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통치자는 다윗보다 더 위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의 원형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회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육식 동물들은 더 이상 다른 짐승을 잡아먹지 않을 것이며, 먹이였던 동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것이다(사 11:6~9).

이사야 11장에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결부되어 있다. 구원의 계획은 초림과 재림이 다 있어야 완성된다. 초림은 이미 이뤄졌고 이제 우리는 모든 소망의 결정체인 재림을 기다린다.

 

<부가설명> 이사야 11장과 35장은 새롭게 창조된 세계의 천연계의 상태를 노래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재창조의 아름다움을 계시한 것이다. 실제로 동물과 초목들이 다 원래 창조될 당시의 아름다움 이상으로 회복될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상징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변화될 것도 나타낸다. 독사 같던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고 사자 같던 사람이 소와 양과 같은 성질로 변화될 것을 나타낸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충만할 때에 이런 상태가 될 것이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교육으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으로 체험하는 지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사람이 예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될 것이지만(요일4:17) 아직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죄의 몸(롬6:6), 사망의 몸(롬7:24), 죽을 몸(롬6:12)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마26:41) 지체 중에 있는 죄의 법이 우리를 죄 아래로 사로잡아(롬7:23) 끌고 갈 때가 자주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기(롬7:22) 때문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시는(고후8:12)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그날까지 인도하신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의 면모를 드러내도록 날마다 굴복하는 믿음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교훈 :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이자 가지로서 다윗의 조상이시며 또한 자손이시다. 그분은 평화를 회복하시며 초림과 재림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완성시키신다.

 

 

1월 28일(목)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사 12:1~6)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이사야 12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안위를 찬양하는 짧은 시가(詩歌)이다. 회복된 남은 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찬양은 미래의 구원을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의 구원에 빗댄다(사 11:16 참고). 그것은 마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때 부른 노래와 같다(출 15장 참고).

 

1. 이사야 12장의 노래를 계 15:2~4에 나오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와 비교해보라. 두 노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찬양하는가?

[사12:1~6]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계15:2~4]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답: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참되심과 자비와 사랑을 찬양한다.

 

사 12:2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고 노래하며 오시는 구원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거의 알려준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마 1:21 참고)이다.

 

2.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예수님의 이름에는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는가?

 

답: 예수님이 구원 자체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뿐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이시다(사 12:2). 우리 중에 임재하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6절)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고후 5:21). 그분은 평화를 가져오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우리의 평화이시다(엡 2:14).

결국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사 11:10)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들리심으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요 12:32~33). 그리고 남은 자들은 우리에게 아기로 오신 “평강의 왕”(사 9:6)이자 “능하신 하나님”(사 10:21)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속량함이 예수님 안에 있다. 즉 구원은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서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그분 안에 있지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속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행위만이 구원을 가져다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

 

<부가설명>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 또는 ‘예수아’를 헬라 철자로 적고 부르는 발음이다. 여호수아 예수아는 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나는 이것을 ‘구원하시는 여호와’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예수님은 삼위일명 여호와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구원이 들어있다. 그 이름은 기념 칭호이다(호12:5).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때에는 그 이름 안에 기억해야 할 기념들이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여러 기념들이 있지만, 구원과 생명이라는 기념도 있다. 그 이름 안에 감추어져 있던 구원의 섭리가 사람이 언약을 어기고(호6:7)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졌을 때 나타났다(딛1:1~3). 그 섭리가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진리이시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 만이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한 사람들은 다 사망이다. 우리가 살아간다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은 죽어간다고 표현해야 정확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오직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겉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4:16). 쉽게 말하면 아담의 후손의 몸을 가진 우리는 날로 후패 곧 썩어져가지만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날로 새롭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아멘.

 

교훈 :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예수님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우리의 구원은 결국 평강과 능력의 왕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1월 2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낀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애의 위험들을 생각하고 걱정한다.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을 사탄의 권세에서 보호해 주고 시험과 투쟁에서 벗어나도록 붙잡아 주길 원한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셔서 더욱 심한 투쟁과 더욱 무서운 위기를 당하게 하신 것은 우리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인생의 길을 안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시대의 소망, 49).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기로 동의하신 분이시다. 어떤 천사나 인간도 그 위대한 사역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오직 무한한 본성을 지니신 분만이 구속의 과정을 맡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인자(人子)만이 높이 들리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자신을 불충성하고 죄 많은 자들과 연결시키고, 인간의 본성에 참여하여 자신의 보혈을 주시며, 그분 자신이 죄를 위한 제물이 되기로 동의하셨다. 하늘의 회의에서 인간의 죄는 헤아려졌고, 죄의 분노는 정해졌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류에게까지 소망을 줄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책임을 감당하겠다고 선언하셨다”(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96년 3월 5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이사야 11장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셨을 때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재림의 때에 있을 일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가 그분의 재림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분의 재림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진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사탄의 마지막 큰 기만에 빠지게 될까요?

※ 사탄이 재림 주로 가장할 때 속을 수 있다. 

 

요약 : 이사야의 이름은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에 자기 백성의 남은 자들을 외세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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