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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믿음의 전진(질문, 대답, 설명) 09/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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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0-09-18 19:24 조회2,6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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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믿음의 전진

 

9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23분

 

● 연구 범위 : 빌 2:5~11, 마 4:18~20, 행 9:3~6, 10~20, 요 21:15~19, 요일 3:16~18

 

● 기억절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5~7).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인류의 애정을 돌이키며 모든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서 이 고통과 죽음의 세상에 오셨다.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구주와 함께 설 때까지는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치러진 대가를 깨달을 수 없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버리시고 하늘 궁전을 떠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실패와 영원한 상실의 위험성을 무릅쓰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면류관을 그분의 발 앞에 던지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소리 높여 노래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131).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치르신 희생은 측량할 수 없이 크다. 물론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에 반응하고 그 명령을 따라 길을 잃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업에 그분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른다. 그러나 우리의 희생은 그분의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영혼 구원 사역은 신앙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안전지대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분은 때로 우리에게 희생하라고 요구하시지만 그보다 훨씬 큰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하신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희생적인 사랑과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느끼기 : 내가 포기하고 헌신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과 행복을 믿고 고대한다.

행하기 :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믿음의 전진을 통해서 끝까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➋ 인류를 만족시키고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빌 2:5~8)

※ 희생의 사랑이다. 

➌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전도와 그렇지 않은 전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 말과 혀로만 하는 것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차이이다. 

➍ 우리가 예수님처럼 전도하려면 어떤 것들을 버릴 줄 알아야 할까요?

※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들도 버려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➎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할 때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과 기쁨이다. 

 

결론 :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희생과 헌신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영광과 행복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분의 선교로 부르십니다.

 

 

9월 20일(일) 자기희생적인 예수님의 사랑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자고 우리에게 권면한다. 이것은 우리를 몇 가지 중요한 질문으로 이끈다. 예수님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분의 사고방식을 지배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분의 생각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1. 빌 2:5~11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지배하는 사고방식과 그 핵심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빌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답: 자기를 비우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생애를 하셨다. 

 

영원 전부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다.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진술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본체’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모르페’이다. 그것은 어떤 사물의 본질을 의미한다. 그것은 동등한 가치를 가진 두 사물을 연결시킨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성부와 동등한 위치에 놓으며, 그를 다른 모든 권세보다 훨씬 위에 놓는다”(제칠일안식일재림교회 성경주석, 13권, 136). 그분의 영원한 본성에 대해서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시대의 소망, 530)고 덧붙였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버리”(빌 2:7, 쉬운성경)셨다. 이는 그리스어로 매우 흥미로운 표현이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텅 빈’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특권과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비우시고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인류의 종이 되셨다. 그분은 종으로서 온 우주에 사랑의 법칙을 보여주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절대적인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영원토록 내어주셨다.

예수님이 가지신 사고방식의 핵심은 자기희생적인 사랑이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분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며 그분이 봉사하는 것처럼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나의 야망’을 비우실 수 있도록 자신을 맡기려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버려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모든 것을 버리셨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빌 2:9)셨다고 했다. 하늘은 우리가 지상에서 무엇인가를 희생하면서라도 갈 만큼 가치가 있다. 그때까지 희생이 계속될지라도 현재 누리는 봉사의 기쁨은 그것을 능가할 것이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기쁨에 비하면 이곳에서의 희생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보일 것이다.

 

<부가설명> 신학의 역사에서 ‘자기를 비워’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무엇을 비웠는지 주장들이많다. ‘비워’라는 말이 헬라어로 ‘케노시스’이다. 신학계에서는 이것을 ‘케노시스설’이라고 하는 것 같다. 대체로 이렇게 정리한 것 같다. “(1)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였다(Plummer). (2) 독립적인 권위 행사를 포기하였다(Hendriksen). (3) 하나님의 대권적(大權的) 권능을 포기하였다(Lightfoot). (4) 존엄과 주권의 표지(標識)를 포기하였다(Calvin). (5) 하나님의 속성 즉 무소 부재, 전지 전능 등을 포기하였다(Forsyth, Mackintosh, Martin).위의 견해들 중 세 번째가 타당한 듯하다(Kent).”(만나주석).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예수께서 비우신 것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라는 구절이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는 것을 비우신 것이다. 이 내용을 먼저 말하고 ‘자기를 비워’라고 했다. 이 구절은 ‘자아’를 비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 삼위 사이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논이 있을 때 말씀 하나님께서 자원하여 자아를 비우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기로 하신 것이다. 만일 세 분께서 서로 사람이 되는 것을 거절했다면 인류의 구원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말씀 하나님께서 자기가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이 권리를 비운 것이다. 본문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깨달았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아를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라고 하셨다. 이것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처럼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 그분은 자기를 비우고 섬기셨다. 우리도 그런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9월 21일(월) 헌신으로의 부르심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9~20).

 

그대가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상상해보라. 싱그러운 갈릴리의 아침, 막 태양이 떠올라 차가운 새벽공기를 밀어내고 있다. 그대의 생각은 한 가지에 고정되어 있다. 많은 물고기를 잡는 것. 최근에 조황(釣況)이 좋았다. 그래서 오늘도 만선을 기대한다. 그런데 어스름한 새벽빛 사이로 나사렛 예수께서 걸어오신다. 그때까지 그대는 잠시 후면 자신의 인생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1. 마 4:18~20을 읽어보라. 베드로와 요한이 기꺼이 예수님을 따르는 극단적인 헌신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성경절 가운데 예수님이 어업보다 더 높은 목적으로 그들을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답: 그들은 이미 1년 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전적으로 높은 부르심에 헌신할 때가 된 것을 예수님의 부르심에서 깨달았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들이 이미 1년 이상 예수님을 알고 지냈지만 아직 완전히 그분께 헌신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그분의 태도와 표정과 언어 그리고 행동에서 이미 그분이 그들을 거룩한 사명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암시가 주어졌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배와 직업과 익숙한 주변 환경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섰던 것은 더 높은 목적을 위한 부르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평범한 어부들은 그들이 비범한 목적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하나님은 그대에게 오늘 당장 생업에서 떠나라고 요구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대 역시 비범한 목적 곧 그분의 사랑을 나누고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진리를 전하라고 부르고 계신다. 

 

2. 마 9:9에서 세리 마태를 부르신 장면을 보라. 이 말씀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은 무엇인가?

[미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답: 마태가 세리라는 사실이다. 그는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예수께서 그를 부르셔서 제자를 삼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했을 것이다. 

 

세리는 이스라엘 전체에서 최고의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대는 마태가 예수님에 대해 이미 들었고 그분을 따르고 싶은 열망이 그에게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받아들이시고 제자 중 하나로 초대하셨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도 더 중요한 삶의 목적을 바라는 갈망이 있다. 우리도 가치 있는 어떤 것, 곧 더 크고 고귀한 목적을 위해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에게 하셨던 것처럼 자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부가설명>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은 우리가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사무엘에게 나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삼상16:7)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시다. 바리새인들이 평가한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학문 없는 범인들이었다. 마태는 세리였으니까 회계학을 배웠는지 모르지만 베드로 형제들, 요한 형제들은 학문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제자로 불러준 예수님이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그들은 신명을 다하여 배우고 순복하는 사람들이었다. 내세울 것이 없으니 자랑할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스폰지 같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도 예수님께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 예수님은 더 높고 고상한 목적을 위해 살고 싶은 갈망을 보시고 세리와 어부들을 그분의 제자로 부르셨고 동일한 목적을 위해 우리도 부르고 계신다.

 

 

9월 22일(화)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 바울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바울의 생애는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셨다. 그분은 그를 안전지대에서 꺼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경험으로 이끄셨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지중해 지역의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의 증언은 기독교뿐 아니라 세상 역사를 바꾸었다.

 

1. 행 9:3~6, 10~20을 읽어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울의 삶에 어떤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는가?

[행9:3~6, 10~20]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답: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종종 가장 의외의 인물들을 선택하셔서 그분의 이름을 전하게 하셨다. 무덤가의 광인, 사마리아 여인, 창녀, 세리, 어부 심지어 잔인한 박해자까지. 이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모두 변화되었고 기쁨에 충만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에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말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그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 전혀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이 너무도 놀라워 그들은 그것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자코 있지 못했다.

 

2. 행 28:28~31과 딤후 4:5~8을 비교해보라. 여기서 영혼 구원 사업에 삶을 온전히 바치겠다는 바울의 헌신이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어떤 단서들이 있는가?

[행28:28~31]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딤후4:5~8]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답: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어도 복음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도록 충성했다고 증언한다. 

 

말년에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바울은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행 28:28)고 확언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모든 사람을 영접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28:30~31). 삶을 마칠 무렵 그는 디모데에게 복음 사업에 전념하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딤후 4:7)다고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우리의 부르심이 바울의 것처럼 극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업에 자신과 함께하자고 우리 각자를 부르고 계신다. 여러 해 동안 부딪힌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부르심에 충실했다(고후 11:25~30).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자가 어떻게 그 신앙의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옹호자가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의 삶을 주의 사업에 바친 이들을 통해서 그분이 무슨 일을 이루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로 남아있다.

 

<부가설명> 예수님을 만나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마음놓고 간증할 수 있다.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사탄이 틈탄 것인 줄 속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으로 자신의 경험을 면밀히 검증하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교과 저자가 예를 든, 바울, 군대 귀신 들렸던 자,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자, 사마리아 여인, 창녀, 세리, 어부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친히 불렀고 고쳐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간증은 성경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경험한 사건이 성경 내용의 일부를 차지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성경 내용의 일부를 차지할 수는 없지만 이어지는 사도행전으로 하늘에 기록되지 않겠는가? 기록된 사도행전 이후의 교회가 진리 안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사도행전의 연속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여 그것을 생활로 옮기고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삶을 보여 주어서 사도행전을 이어가는 귀한 경험을 이룬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삶이겠는가!

 

교훈 : 예수님은 종종 의외의 인물들을 그분의 그릇으로 선택하신다. 가장 극렬한 반대자도 부르신 그분은 오늘날 우리도 그분의 증인으로 부르고 계신다.

 

 

9월 23일(수) 사랑의 요구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사랑은 항상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도 길을 잃은 인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하며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진술했다. 기독교는 구원을 받기 위해 나쁜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포기하신 것은 하늘의 나쁜 것들이 아니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좋은 것을 포기하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시간과 재능, 재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달라고 하신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만나신 어느 아침에 예수님은 거룩한 사랑의 요구를 멋지게 요약하셨다.

 

1. 요 21:15~19을 읽어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엇을 세 번 물으셨는가?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했는가? 예수님은 왜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을까?

[요21:15~19]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답: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예수님이 아신다고 대답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관련하여 그를 온전히 회복시키는 사랑을 베푼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입술로부터 세 번 사랑한다는 대답을 이끌어내셨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함을 받았고 예수님이 여전히 그를 위해 일하리라는 사실을 그에게 재확신시키셨다.

 

2. 이번에는 베드로의 확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주목하며 요 21:15~19을 다시 읽어보라. 예수님은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요21:15~19]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답: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내 양을 먹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또 베드로가 순교할 것을 미리 말씀 해주셨다. 

 

거룩한 사랑은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다. 진정한 사랑은 따뜻한 느낌이나 좋은 생각 그 이상이다. 그것은 헌신을 포함한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재촉한다. 그것은 절실한 필요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 길을 잃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끈다. 예수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명령이자 보증이었다. 주께서는 사랑의 응답을 요구하셨다. 더불어 자신이 체포되셨던 날 베드로가 보여준 수치스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위해 일하시리라고 격려하셨다. 베드로는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하기까지 했었다. 그대도 주님을 크게 실망시켜드렸을지도 모른다. 그대의 행동으로 그분을 부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은 아직 그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분이 그대를 위해 일할 여지는 아직 남아있다.

 

<부가설명>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저주하며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베드로는 이기심의 지배를 받아 자기의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로 부인한 것은 아니다. 겁에 질려서 부인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잘 아셨다. 끝까지 그를 사랑하시고 베드로가 떨어지지 않돌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눅22:31.32). 예수님은 베드로가 충성할 것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끝까지 사랑하신다. 우리가 비록 미련하고 더 큰 믿음으로 헌신하지 못해도 우리가 정직하게 말씀 안에서 진리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고 할 때 베드로에게 베푼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도 베푸신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하여 양들을 예수님의 우리 안에 이끌기 위하여 헌신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고 주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하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교훈 :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며 믿음을 다시 세우고 그를 위해 일하셨던 주님은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부르신다.

 

 

9월 24일(목) 사랑의 헌신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의 끝에서 우리는 호숫가를 걷는 두 사람을 본다. 파도가 찰랑이는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제자도의 대가에 대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부르심을 받아들일 때 그가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분명히 알기를 바라셨다.

 

1. 요 21:18~19을 읽어보라. 예수님은 제자 됨의 대가에 대해 베드로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대는 예수님이 왜 이 시점에서 베드로에게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려주셨다고 생각하는가?

[요21:28,2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답: 베드로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로 고난의 길을 걸을 것이며 종내에 순교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의 거취를 확정해야 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셨고 베드로는 순교의 길을 걷기로 굳게 다짐했다.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언젠가 경험하게 될 순교에 대해 예언하셨다. 그의 팔은 십자가 형틀 위에 벌려질 것이었다. 이 예언을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선택권을 주셨다. 그의 삶에는 큰 기쁨이 있을 것이었다. 그는 영혼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것이었다. 오순절에 수천 명이 그리스도께로 올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수많은 군중 앞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할 것이었다. 그는 그분의 선교를 수행하면서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는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특권에는 대가가 따를 것이었다. 그것은 희생 곧 큰 희생을 요구할 것이었다. 베드로는 눈을 똑바로 뜨고 헌신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너무 커서 예수님의 선교에 동참하기 힘든 희생이란 없다는 것을 알았다.

 

2. 요일 3:16~18을 읽어보라. 요한에게 사랑이란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 그 이상이다. 요한은 사랑이 치르는 궁극적인 희생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요일3:16~18]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답: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고,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사랑의 진실과 행함이라고 가르친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동안 우리가 했던 일은 전혀 희생 같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과 삶은 과도하게 보상을 받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랑을 행동으로, 의향을 헌신으로 바꾼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오는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지역 사회로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언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주저 없이 거룩한 사랑에 반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실현하며 생애의 가장 큰 기쁨을 경험한다. 예수님도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고 말씀하셨다. 최고의 기쁨과 행복은 우리가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전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성취할 때 이르러온다.

 

<부가설명> 우리가 사랑을 감성적이거나 또는 도덕적 동정과 희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일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과 전혀 다르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사랑도 포함된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사랑의 본질은 존재론적이며 생명론적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으로 증명하셨다. 곧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단순히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셨다. 여기까지 이르러야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을 실현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사망의 존재에게 영생의 생명을 전하여 생명의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탄에게 속한 자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실천이 전도하는 것이다. 받고 안 받고는 듣는 사람의 몫이지만 사랑의 성도들은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사랑을 베푼다. 그들이 이 사랑을 받아들이면 생명을 얻고 거절하면 사망에 머물다가 영원히 존재와 생명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사랑은 심판을 포함하고 있다. 결정은 듣는 사람들이 한다. 집행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하시고 집행하신다.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정신이 전혀 없이 감성적 도덕적 사랑만 베푸는 것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라는 말씀에 해당될 뿐이다.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기를 기도하자.

 

교훈 : 진정한 사랑은 행동하며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은 우리가 사랑과 진리를 나눔으로 얻는 기쁨과 영원한 행복에 비교할 수 없다.

 

 

9월 2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를 영적으로 감독하는 자들은 모든 교인이 하나님의 사업에서 특정 부분을 담당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을 고안해야 한다. 과거에는 이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깨닫는 자도 소수에 불과했다.

지도자들은 현명한 장군처럼 모든 전선(戰線)에서 전진(前進)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계획을 세울 때 그들은 신자들이 그들의 친구와 이웃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해 특별히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은 우리 교회의 모든 신자가 그 사업에 동원되어 목사와 교회 직원들로 더불어 연합하기 전에는 결코 마쳐질 수 없다.…

모든 교회에는 올바른 종류의 활동을 함으로써 이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 위하여 계발될 수 있는 재능이 있다. 우리의 교회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재능, 주께서 사용하시도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재능을 분별하고 계발하기 위하여 현명한 일꾼들이 철저하게 활동하는 것이다. 교회들을 굳게 세우고 불신자들을 위한 활동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크거나 작거나 우리의 모든 교회 안으로 들어갈 교역자들의 채용을 위해 잘 조직된 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필요한 것은 훈련, 곧 교육이다. 교회들을 방문하는 자들은 형제와 자매들에게 선교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가르쳐야 한다(교회증언 9권, 116~1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에 주어진 권면의 핵심 사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대의 전도 활동과 교회의 선교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 전도를 위하여 재능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워서 실천하라는 것이다. 

 

➋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반면 거짓 사랑은 어떤 형태로 나타납니까?

※ 행함과 진실함으로 드러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

 

➌ 죽음을 포함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런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죄의 세상에서 성경적인 신앙으로 사는 것은 핍박을 각오한 삶이다. 그럴 때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기도록 인내와 사랑을 드러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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