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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난해 구절을 다루는 법(질문, 대답, 설명) 0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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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0-06-13 02:15 조회3,4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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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난해 구절을 다루는 법

 

6월 20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7분

 

● 연구 범위 : 딤후 2:10~15, 대상 29:17, 약 4:6~10, 갈 6:9, 행 17:11 

 

● 기억절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베드로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 대해 논하면서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벧후 3:16) 이른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이 아니라 단지 일부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상해 보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과 마주칠 때가 있기 마련이다. 분명히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우리는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 자체를 연구하기보다 이런 난관이 주어지는 이유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그런 것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어쩌면 이 땅에서는 그런 까다로운 진술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의 대부분은 어떤 난해함도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히 일부의 어려움 때문에 성경 전체의 신뢰성과 권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킬 필요가 없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성경의 난해절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정직과 겸손, 인내와 기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느끼기 :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서 모순이 없는 진리를 계시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행하기 :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실천하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끈기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한다.

 

➋ 그대는 혹시 성경을 읽다가 문법적인 오류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오류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 만일 확실하다면 인정해야 한다. 기자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 전체를 깨닫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➌ 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 기도, 끈기, 겸손, 자아부정이 필요하다.

➍ 이번 과의 기억절(벧후 3:15~16)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알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억지로 풀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➎ ‘진리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라는 말은 어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 진리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사람이 만들 수 없다. 

➏ 우리가 매일 진리를 만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어떤 결심이 필요할까요?

※ 자아부정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명상해야 한다.

 

결론 : 언어로만 보면 성경에도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의 지혜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이 성경 전체에서 일관성 있게 제시하는 진리를 위협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6월 14일(일) 외견상의 모순에 대한 개연성 있는 이유

 

1. 딤후 2:10~15을 읽어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지런하고 바르게 진리의 말씀을 다루라고 훈계한다. 여기서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해 어떤 중요한 기별을 제시하고 있는가?

[딤후2:10~15]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답:  진리를 옳게 분별하라는 중요한 기별이다.

 

진지하고 정직한 성경 연구자라면 성경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모든 분야의 지식을 다 알 수는 없다. 하물며 신령한 영역이랴. 따라서 무지하고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자 한다면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경의 난해함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의 허위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자들은 종종 그러한 난해함을 모순과 오류라고 단언한다. 그들에게 성경은 단지 인간의 책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이 불완전성과 오류를 내포한다고 믿는다.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하나님의 영감에서 비롯된 성경의 통일성과 신뢰성을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성경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하는 사람은 성경의 남은 부분에 대해서도 곧 의심과 불확실성의 늪에 빠질 것이다. 

성경의 부분적인 불일치는 필사자 또는 번역자들의 사소한 실수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진술했다. “신중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성경 필사자들 또는 번역자들이 어떤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들이 있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일이 있음직하지만 편협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가능성이나 우연의 일치에 대하여 주저하게 되고 걸려 넘어지게 되는데 이런 자들은 그들의 미약한 정신력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통찰할 수 없으므로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의 신비들을 쉽사리 곡해하게 된다. 신령한 것에 속한 것일지라도 단순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받아들이고 식별할 만한 단순한 것들을 그들은 너무도 쉽게 곡해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6)

 

<부가설명>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사람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라고 한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타내주지 않은 것은 비록 기록되었다고 해도 우리가 몰라도 괜찮은 것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람이 다 알 수 없다는 뜻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도 다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보다 더 알 수 없다. 나타내주신 것도 다 알기 쉽지 않다.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예수님도 그렇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계19:12). 예수님도 사람이 다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전체를 계시해주시는 과정에서 알기 어려운 것도 포함될 수밖에 없는 장면에서 그것을 기록하에 하셨으나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겸손한 연구 태도이다. 

 

교훈 : 성경은 일부 난해함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성경 전체의 신뢰성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6월 15일(월) 정직하고 신중하게 난해 절을 다룸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대상 29:17).

 

그대는 성경을 읽다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다른 성구들 또는 일반적인 현실과 조화롭지 않은 성구를 본 적이 있는가? 한두 번쯤 이런 문제와 마주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때 그대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1. 대상 29:17, 잠 2:7, 딤전 4:16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들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난해절을 다루는 방법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대상29: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잠2: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딤전4: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답: 정직하게 성경을 연구하라는 말씀이다. 성경 연구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가린다. 자기 자신을 살펴서 가르치는 것이 바르게 깨달은 것인지 확인하고 바르게 잘 가르치라는 교훈이다. 

 

정직할 때라야 우리는 어려움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정직은 우리가 어려움을 모면하거나 그것을 모호하게 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한다. 또한 정직은 우리로 하여금 철저한 검토를 요구하며 그러한 시험에 미치지 못할 표면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게 한다. 하나님은 정직과 진정성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행하는 모든 일 속에 심지어 성경을 연구할 때도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야 한다.

정직한 사람은 난해절을 다룰 때에 문맥 외의 정보를 제시하거나 복잡한 언어로 진리를 왜곡하거나 증거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호도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회피성이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해결책을 제시하느니 입증 가능한 해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낫다. 정직한 태도로 성경을 연구할 때 긍정적으로 따라오는 부수적인 효과는 그것이 신뢰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모든 건강한 인간관계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얄팍한 대답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설득력이 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닌데 그것을 통해 그대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또는 그 성경절을 어떻게 정확히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신중한 사람은 성경의 진리를 알기 원하기 때문에 제한적인 지식이나 얄팍한 증거에 기초한, 성급한 결론에 이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중요할지도 모르는 어떤 측면이나 세부 사항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들은 속단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고 부지런히 연구하고 관련된 모든 정보를 참고한다.

 

<부가설명> 성경을 연구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하나님 뜻대로 성경을 연구하려는 정신인지, 자기의 생각을 입증하려는 마음인지, 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을 부정하려는 태도인지, 이런 것에 정직하에 자기를 살펴서 하나님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대로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방법)은 사람과 다르다.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지혜와 사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는 정신을 버려야 한다. 성령께서 전적으로 인도하시도록 말씀에게 맡겨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했다(히4:12).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활동한다. 사람은 죽었다고 했다(고전15:22). 죽은 사람이 산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은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길을 걸어간다. 가만히 따라가면 바른 해석을 찾을 것이다(고전2:9~14). 

 

교훈 :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절을 내키는 대로 해석하기보다 바른 이해에 이를 때까지 철저하고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한다.

 

 

6월 16일(화) 겸손하게 난해절을 다룸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1. 약 4:6~10, 대하 7:14, 습 3:12을 읽어보라. 성경의 난해절을 다룰 때에 겸손함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약4:6~10]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습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답: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고 보호하신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자신 밖의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경이로운 깨달음 또는 겸손한 통찰에 이르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들은 자신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런 사람은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아의 필요 이상으로 진리를 소중하게 여기며 진리란 그들이 만드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나야 할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사람이 알게 되는 최고의 깨달음은 아마도 그들이 진리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자신이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고전 13:12)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사고(思考)에 있어서 이러한 겸손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겸손한 탐구 습관은 모든 지적인 성장의 기초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솔직함을 낳고 솔직함은 자연스럽게 배우려는 정신을 기르기 때문이다. 이는 겸손한 사람들이 꼭 옳지 않거나 항상 생각을 바꾸고 전혀 확고한 신념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성경 진리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있는 지식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지성적이고 거만하고 교만한 자들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이해력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인도를 받겠다는 겸손한 마음 그리고 구원의 지식을 알아내겠다는 탐구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허용하지 않은 정신을 말씀 연구에 끌어들이는 자들은 성경 연구로부터 성경이 부여하지 않은 정신을 도출해 낼 것이다. 하나님은 무관심한 마음에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스스로 불경하고 더렵혀진 자에게는 가르침을 허비하지 않으신다”(엘렌 G. 화잇,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1907년 8월 22일).

그러나 유혹자는 모든 심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안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기꺼이 폐하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마음을 겸손히 하고 정직함과 경외의 마음으로 생명의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겸손하게 반성하는 마음만이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지혜와 지식이 탁월하다고 해도 하나님과 비교가 되겠는가? 이미 말했지만, 생각과 길(방법)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밝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감히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해석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을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루시퍼 정신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라는 정신과 태도로 말씀 앞에 임해야 한다. 호렙산 기슭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는 당시 가장 문명한 애굽의 왕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배운 학문과 경험으로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하니 네 발의 신을 벗어라’(출3:5)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공부할 때 그 사람은 거룩한 땅에 선 것이다. 신발 벗고 서야 한다. 신발은 기득권을 상징한다. 모든 학문, 모든 경험, 모든 이론, 모든 것을 완전히 벗고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정신으로 설 때 성령께서 사람을 애굽 정신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이것은 성경 말씀 앞에서 절대로 중요한 태도이다. 아멘.

 

교훈 : 진리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며 오직 겸손과 경외의 심령으로 말씀을 펴는 자에게만 진리의 빛이 비춘다.

 

 

6월 17일(수) 끈기와 인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1. 갈 6:9을 읽어보라.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할 때 인내심을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다룰 때도 그와 동일한 태도가 필요하다. 왜 끈기와 인내가 문제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가?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답: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까지 기도와 인내로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취에는 항상 끈기가 요구된다. 너무 쉽게 얻은 것은 너무 가볍게 평가되기 마련이다. 성경의 난제는 우리의 뇌를 활성화시킬 기회를 제공하고 해결책을 찾는 동안 필요한 끈기와 인내는 그 쟁점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낸다. 말씀의 진의와 기별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데 들인 모든 시간은 의미 있게 보낸 시간이다. 때로 긴 시간 동안 열렬하게 성경을 연구한 경험은 해답 자체보다 더 큰 복이 될 것이다. 즉 성가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된다.

그대가 난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명백한 사실을 자주 간과한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난관에 부딪히면 잠깐 고민을 한 뒤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곧바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직행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신뢰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제한된 지혜로 보지 못할지라도 매우 쉬운 해결책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학에 막 입문한 학생이 30분 동안 어려운 문제를 풀다가 실패하고선 자신이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다고 선언한다면 어떻겠는가?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난제들이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그대의 처절한 노력을 좌절시킨다면 그것들을 잠시 동안 접어 두고 대신 그 사이에 하나님이 그대에게 명확하게 보여주신 것들을 실천하라.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이미 알려주신 것들을 따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어떤 영적인 통찰들을 얻는다. 따라서 성경을 연구할 때 참고 인내하라. 결국 인내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다(계 14:12 참고).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래 참으신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밷후3:15,16). 알기 어려운 것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면 주님이 오래 참으시는 동안 성령으로 깨닫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18). 그러므로 끈기를 가지고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신발 벗고, 거룩한 땅에 선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는 마음과 태도로 기다리면 주께서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롬4:3)라고 문의하며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바울처럼 전에 유익하다고 생각한 그것이 말씀을 바르게 깨닫는데 해롭다는 것(빌3:7,8)을 속히 배울수록 말씀을 바르게 깨닫는 기쁨을 빨리 맛볼 것이다. 아멘.

 

교훈 : 성경을 읽다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실천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영적인 통찰을 얻을 필요가 있다.

 

 

6월 18일(목) 기도하는 마음으로 난제를 다룸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1. 행 17:11, 8:35, 15:15~16을 읽어보라. 초기 교회의 사도와 신자들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했는가? 성경이 성경 해석에 필요한 가장 좋은 자료인 이유는 무엇인가?

[행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행15:15,16]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답: 성경에서 대답을 찾았다. 성경에서 대답을 찾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해석하신 것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난제를 위한 최고의 해결책은 여전히 성경 안에 있다. 어떤 한 성경절을 다른 성경절들 또는 전체 성경으로부터 고립시켜서 다루기보다 전체 성경의 빛에 비춰서 연구할 때 성경의 문제들은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게 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사용해야 한다. 성경에 있는 위대한 진리를 캐내는 법은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그대가 어떤 성경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성경 구절들로부터 빛을 모으라. 덜 확실한 구절들에 빛을 비춰줄 수 있는 명백한 성경의 진술들을 찾기 위해 항상 노력하라. 그리고 명백한 성경의 진술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에 가져감으로써 그것마저 어둡고 모호하게 만들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성경 이외의 자료나 철학, 과학 등을 가지고 성경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 성경 말씀이 그 의미를 스스로 밝히게 해야 한다. 

우리가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어려움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던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도 빛을 비춰주시기를 구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동기를 드러내고 우리가 읽은 것을 왜 이해하기 원하는지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그분의 말씀을 볼 수 있게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그분의 진리를 따르고 실천하는,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이미 성경에 계시하신 말씀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항상 성경과 일치하시며 성경의 기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신 것들을 확증하시고 확장하신다.

 

<부가설명> 자기 지식과 지혜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자기보다 미련한 존재로 여길 위험이 있다. 루시퍼 정신이다. 성경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바로 그런 정신이다. 성경 밖의 시각으로 보면 성경은 모순과 비합리적인 것이 수두룩하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다 서식을 기준으로 육시 서식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성경을 보면 전적으로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것을 발견하고 경탄하고 감사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에서 짝을 찾아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사28:13). 모세에게 하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3:6)이라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말씀이라고 해석하셨다(막12:24~27). 우리가 그냥 출애굽기의 이 구절을 읽으면 그것이 부활에 관한 말씀이라고 감히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해석해주신 것을 읽을 때 그 뜻을 알고 생명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이처럼 성경에는 성경을 해석하도록 조치가 되어 있다. 퍼즐은 그 차체에 서로 들어맞도록 되어 있다. 성경도 퍼즐과 같다. 전체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절대로 억지로 끼어 맞추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기도하며 신발 벗고 이것을 찾도록 성령의 도움을 가절히 구하라. 너무 빨리 주석이나, 다른 사람의 견해를 찾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도 동일한 사람이다. 오직 성령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 최우선이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참고서를 활용할 것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아멘.

 

교훈 : 우리는 성경의 난제를 풀 때에 그 무엇보다 성경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며 성경 기자에게 주신 동일한 성령으로부터 빛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6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105~113 ‘의혹을 어찌할까’를 읽어보라.

성경에는 유한한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고 우리가 온전하게 설명하기에는 너무 심오한 신비들이 많다. 이것이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고 성경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자발성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충실하면 그 의미가 때로 우리의 기질을 거스른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로 의미하는 바를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충실하면 그 본문을 수정하거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회피하기보다 그것을 존중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건한 마음과 기도하는 정신이 없이 펴거나 생각과 애정을 하나님께 두지 아니하며 그의 뜻에 융화시키지 아니하고 펼 때에 우리 마음은 의혹으로 흐려져서 성경을 연구하는 그것이 도리어 회의주의를 강화시킨다. 원수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여 옳지 않은 해석을 하게 한다. 항상 말과 행실에 있어서 하나님과 화합하기를 힘쓰지 아니하면 아무리 유식할지라도 성경을 그르게 해석하기 쉽기 때문에 그 성경 해석을 그대로 받기는 위험하다. 무슨 오류를 찾으려고 성경을 살피는 자들은 영적 통찰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왜곡된 시선으로 단순하고 까다롭지 않은 것들 속에서도 의혹과 믿지 못할 만한 조건들을 보게 된다”(정로의 계단, 110~11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이번 주에 논의한 태도들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을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또 다른 중요한 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어려운 구절드을 이해하는 지침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다. 

➋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고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천연계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만 보더라도 그것은 얼마나 많은 신비에 싸여 있습니까?

※ 유한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➌ 일례로 눅 23:43에서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요 20:17, 전 9:5, 고전 15:16~20은 그 말씀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 이 모든 구절들은 영혼불멸설이 진리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구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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