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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섬기는 자들의 공동체(질문, 대답, 설명) 09/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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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09-20 18:15 조회4,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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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섬기는 자들의 공동체

 

9월 28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21분

 

● 연구 범위 : 고후 2:14~16, 출 32:1~14, 벧전 2:12, 빌 2:15, 엡 2:19, 히 10:23~25

 

● 기억절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3~24).

 

기독교 사명을 성취하려고 할 때 우리는 조직화된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교회의 잠재적인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의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부딪힐 수 있는 장애들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동료 신자들과 함께 일함으로써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세상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교회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교회 자체를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목적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교회의 몸으로서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신실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억눌리고, 굶주리며, 헐벗고, 가련한 자들을 돕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조직이자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 12:12~20 참고).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행하고, 그분이 접촉하셨던 것처럼 접촉하며 오늘날 이 세상에서 그분의 손과 발, 마음과 음성이 되어 섬겨야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남은 자손으로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재해야 하는 재림교회의 역할을 깨닫는다.

느끼기 : 결실이 빈약할지라도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믿음과 동료 신자들의 격려로 용기를 얻는다.

행하기 : 섬김의 공동체로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보여주고 실현해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➋ 우리가 남은 자손이라는 것은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➌ 전도가 교회 성장의 수단이 아니라 정의의 표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생활이 예수님의 향기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➍ 어떻게 하면 교회의 선교사업과 구제사업을 융합시킬 수 있을까요?

※ 이번 교과가 계속 가르치는 원리를 잘 이해하고 실천해보면 되지 않을까?

➎ 사랑과 은혜와 정의의 원칙으로 제대로 운영된다면 교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 정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랑과 화평이 넘치는 가정이 될 것이다. 

➏ 우리 교인들이 다함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 확장시켜야 할 섬김의 사역은 무엇일까요?

※ 구제와 봉사와 생명의 복음인 세 천사 기별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를 남은 자손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부르심 속에서 이 세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중재해야 할 우리의 역할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림교회는 더 많은 신자를 확보할 뿐 아니라 곧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변화를 가져오는 섬김의 공동체로 세상에 존재해야 합니다.

 

 

9월 22일(일) 변화의 대리자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우리는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특별한 형태의 사회를 건설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은 궁핍한 자들을 돌보면서 그들의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이루시고 있는 일들에 동참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했다.

소금과 빛의 비유에 덧붙여 바울은 세상에서 이뤄가야 할 교회의 행동을 여러 은유를 활용하여 묘사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자들을 하나의 제물로(롬 12:1 참고), 그리스도의 몸으로(고전 12:12~20 참고), 대사로(고후 5:18~20) 그리고 향기로(고후 2:14~16) 묘사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대쟁투가 벌어지는 이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1. 이러한 대리자의 역할들에 대해 묵상해보라. 그대는 지역사회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방식을 어떻게 대표하기를 원하는가? 그대의 생각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각 사람이 자기생각을 적어봐야 할 질문이다. 바울이 말한 은유들은 일단은 성도 전체적인 것이다. 그 중에도 각 사람이 자기에게 특별히 맞는 은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적어보기 바란다. 향기? 대사? 

 

각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그 행동이란 하나님께 가납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가납되었기 때문에 상처입고 죽어가는 세상 속에서 그분의 대리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반응하는 백성으로서의 행동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더 깊은 차원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그분의 나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 같이 사랑과 은혜로써 그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반사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그 영원한 나라를 이루며 참여하는 것이다.

국제법상 한 나라의 대사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외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가 대표하는 나라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방법을 이행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그 영원한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며 악의 패망을 미리 맛보게 한다. 그리스도의 사도와 그분의 대리자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과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섬기려는 자들의 삶 속에서 성취되는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생생하게 경험한다.

 

<부가설명> 오늘 교과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천국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사람 천국이고 하나는 신천신지 천국이다. 즉 환경도 천국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하늘이라는 위치에 있는 어떤 나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성경은 그렇게 계시하지 않는다. 환경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된 이 지구이다. 지구를 떠나서 하늘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이 지구를 낙원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낙원이 사망의 세상으로 변질 된 것을 다시 처음 창조하신 목적대로 낙원으로 회복하신다. 그 회복된 낙원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처음에 낙원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그들이 뱀의 유혹에 빠져서 낙원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이 먼저 천국이 되게 한 다음 천국이 된 사람들이 살기에 합당하도록 다시 낙원, 곧 환경 천국을 만드신다.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사람천국이다. 이들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사람으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신 모습니다. 지금 교과는 그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곧 변화의 대리자라는 말이 그것이다. 

 

교훈 :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 우리의 삶과 교회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려는 자들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9월 23일(월) 섬기는 남은 자손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성경 예언이 밝히는 남은 백성의 표준적인 정의는 계 12:17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계 14:12 참고). 성경을 보면 이러한 조건들은 지구 역사의 최종 단계에 존재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특징을 묘사한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우리는 남은 무리가 어떻게 행동하며 특별히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지에 대한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1. 이것과 관련된 모세의 사례는 충격적이다. 출 32:1~14을 읽어보라. 이 일화 속의 모세와 계 12:17에 묘사된 남은 자손 사이에 비슷한 점은 무엇인가?

[출32:1~14]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답: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굳게 섰던 것처럼 남은 자손들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증거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모세가 반역한 사람들과 투쟁한 것처럼 남은 자손은 용과 투쟁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거두어들여서 모세와 그의 가족에게 옮기겠다고 하셨다(출 32:10 참고).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모세는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일은 그분 자신을 나쁘게 보이게 할 것이라고 대범하게 말했다(출 32:11~13).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그의 간구를 아뢰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을 해방시켰을 때부터 모세는 그들의 불평과 시비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수 없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출 32:32)달라고 했다. 모세는 자신의 영생을 포기하더라도 그와 여정을 함께 했던 자들을 구원하려고 했다.

자격이 없는 자들을 위한 자기희생적인 중보를 보여주는 이 얼마나 훌륭한 예인가! 또한 구원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얼마나 훌륭한 상징인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여러모로 정력을 쏟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때문에 모세는 소심한 마음을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할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의 이기심 없는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을 시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실성과 범죄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이 시련을 고상하게 잘 견뎌냈다”(부조와 선지자, 319).

 

<부가설명> 모세는 자기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받아 백성들에게 전한 자요 계명의 돌비를 받아 언약궤에 넣은 자이다. 그는 반역한 백성들을 진정한 긍휼로 섬겼다. 역사의 종말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소, 원문을 정확하게 말하면 그 여자의 씨의 남은 자손들은 종말 시대의 배도한 사람들을 모세의 심정으로 섬기며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여 그들을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봉사를 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먼저는 모세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언의 말씀을 잘 깨닫고 순복하고 다음은 모세처럼 배도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을 드러내고 주위에 천국의 원칙을 생활로 드러내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배도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기별이 세 천사의 기별이다. 이 기별의 내용을 올바르게 깨달아서 올바르게 전파해야 할 것이다. 모세의 마음이 이것을 실천하는 것에 나타나게 되지 않겠는가?

 

교훈 : 모세가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명을 걸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했듯이 남은 자손은 그와 같은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9월 24일(화) 영혼들에게 다가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교회의 논의는 복지 사업이냐 복음 사업이냐, 자선 사업을 하느냐 전도를 하느냐, 정의냐 선교냐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의 개념을 더 자세히 이해하고 예수님의 사역에 주목한다면 차이점들이 사라지고 복음 전파와 다른 이들을 돕는 사역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엘렌 G. 화잇의 권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진술 중 하나를 읽어보라.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은 구제를 받고, 병든 사람들은 간호를 받고, 슬픔과 사별(死別)을 당한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무식한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권면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해야 한다”(치료봉사, 143).

천국의 두 가지 활동 즉 정의 실현과 복음 전도는 예수님의 사역에서뿐 아니라 보냄을 받은 제자들의 사명에서도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7~8). 요컨대 기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1. 벧전 2:12과 빌 2:15을 읽어보라.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는 착한 일에 복음을 증언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빌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답: 선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고 말했다. 또 흠 없고 순전한 삶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복음을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면 인간에 대한 열정이 없는 전도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요일 3:16~18과 약 2:16 같은 성경절들은 복음대로 살지 않으면서 전하는 복음의 모순을 지적한다. 최상의 의미에서 희망, 구제, 회개, 변화 그리고 모두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다주는 전도는 일종의 정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전도와 정의에 대한 열망은 둘 다 상하고 상처 입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할 때 비롯된다. 그러한 사랑은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시는 감화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난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더불어 일하고, 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며,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원을 활용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할 뿐이다.

 

<부가설명> 부자들은 부자 티를 낸다. 같은 수준이 아니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집부터 그렇다. 보안이 철저해서 함부로 들어가지도 못한다. 이들은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조처를 취해놓은 사람들이다. 오늘날은 아무집이나 전도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소외층이 문을 열고 복음을 받기 쉽게 되어 있지 않는가? 예수님 당시도 그랬다. 이런 이유로 복음을 들고 가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외롭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게 되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베푸는 삶이 보상을 바라지 않더라고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감동 된 마음이 복음을 위하여 열리면 성령께서 전도자를 통하여 생명의 말씀의 씨를 심게 하고 싹 나고 자라게 하신다. 교회가 보상을 바라지 않는 태도로 이 일을 지역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천하면 열매는 성령께서 거두도록 하실 것이다. 영혼을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성도는 씨를 심고 물을 주면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주신 달란트를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 아닐까?

 

교훈 : 교회는 사회 사업과 선교 사업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지만 두 사업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므로 복음 전파와 정의 실현을 함께 이루어 가야 한다.

 

 

9월 25일(수) 교회 안에 있는 은혜

 

욥기 초반에서 하나님은 욥과 그의 신앙을 인류를 대하시는 그분의 선하신 방법의 증거로 제시하신다(욥 1:8 참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지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따라 자신의 명예가 좌우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일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기대를 교회 공동체 전체로 확장시킨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

 

1. 엡 2:19을 읽어보라. 그대는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묘사하는 개념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설명은 교회의 운영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답: 권속이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한 가족으로 엮인 사랑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어느 공동체나 조직에서든지 그 단체가 그 구성원을 다루는 방식은 그 집단의 기본적인 가치관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권속이자,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는 실행되고 부응해야 하는 최고의 부르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모든 회중 안에서 그러하듯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고전 14:33)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정의와 은혜와 사랑으로 증명하신 것처럼 그러한 가치들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배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 지역 교회 공동체로부터 세계 교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원칙들은 지도자들이 조직을 이끌고, 결정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는 방식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그 원칙들은 또한 때때로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해결하는 지침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속한 자들을 공정함과 고상한 방법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고용할 때 교회는 관대한 고용주가 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사람을 가치 있게 여기며 구성원들 사이의 불공평한 처우를 지양해야 한다. 교회는 곤경에 처한 자들을 보호하는 일들을 실천하는 모든 교인에게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초기 교회에서 보았듯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특별히 고난을 겪거나 궁핍한 교회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하시면서 이것이 믿음의 공동체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가설명> ‘권속’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케이오스’인데 가정이라는 말이다. 직역하면 ‘집에 속하는’이라는 형용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 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집안의 자녀들인 것이다. 화목한 가정의 가족들은 사랑과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처럼 교회의 교인들이 이런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권속’이라는 한 단어로 나타낸 것이다. 교회는 이런 정신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는 여러 상징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엡2:20,21) 예수 그리스도의 몸,(엡1:23) 하나님의 집(딤전3:15) 등등. 어떤 상징으로 나타내어도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중심이다. 성전일 때에 성도들은 제사장들이고, 예수님의 몸일 때에는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고 하나님의 집일 때에 성도들은 그 가족들이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은 거룩해야 하고 사랑으로 화목 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수행하는 근본도리는 변함이 없다. 교우들은 성경이 계시한 그 사상을 확실히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충성해야 할 것이다. 

 

교훈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정의를 운영 원칙으로 삼고 교회 구성원을 공정하고 관대하게 대하며 세상을 섬기는 사역을 지지하고 보호해야 한다.

 

 

9월 26일(목) 서로 선행을 격려하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우리가 하나님과 선의 편에서 좋은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주를 위한 사역은 어렵고 실망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슬픔과 고통의 세계 안에서 산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 이러한 유형의 지원 공동체를 만드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단독으로는 거의 파송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럴 때는 곧바로 복귀해서 그들의 경험을 나누고 힘과 용기를 재충전하게 하셨다.

 

1. 히 10:23~25을 읽어보라. 23~24절은 25절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히10:23~25]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답: 한 소망으로 굳게 연합해서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때 모이기를 폐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더욱 자주 모이면서 소망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어떤 임무나 계획이든지 여럿이 협력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성취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롬 12:3~6 참고). 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가 제일 잘 하는 일을 하되 협력하는 방식으로 해 나아간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과 사역이 영원한 나라를 위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 결과도 중요하지만 종종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길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빈곤율을 낮추고, 곤경에 빠진 자들을 보호하며,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고, 말 못하는 자들을 대변해 주려고 일하지만 거의 진전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사역에는 원대하고 필연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는 명분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히 13:16 참고).

이것이 우리가 서로 용기를 주고 격려하도록 부름을 받은 이유이다. 신실하게 산다는 것은 기쁘면서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정의로우신 우리 하나님과 정의로운 우리 공동체가 우리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 우리는 바로 이 공동체에 참여하라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부가설명> 이 번 기 교과를 공부하면서 많은 새로운 개념을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원칙을 배우고 확실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나 모세 시대나 오늘이나 인간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 소위 문명권에서는 생활이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남미나 또 어떤 곳에는 빈곤과 원시적 생활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문명권에서는 이 교과 가 가르치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엄청 어렵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문명권에 사는 성도들이 밀림이나 사막이나 산악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찾아나가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원칙을 우리가 사는 환경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교회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찾아서 실천해 보는 것이 출발이 될 것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 내부의 일이 많아서 더욱 어렵지 않은가? 먼저 교우들이 사랑하고 격려하며 정말 화목이 넘치는 가족이 되는 경험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상태를 가지고 이웃을 봉사하기 위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요즘 TMI 프로그램을 실천해서 이 교과가 제시한 봉사를 실천하는 교회들이 많이 생기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과는 성령께서 거둘 것이다. 

 

교훈 :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사역에는 많은 난관과 실망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9월 2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도행적>, 546~556 ‘충실한 증인’, <구호봉사>, 81~86 ‘마음에 이르는 열쇠가 되는 친절’을 읽어보라.

 

“제자들이 한 일을 우리도 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동정과 긍휼로써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며, 이타적인 열성으로 고통당하는 인류의 불행을 가볍게 해 주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주린 자들을 먹이고, 벗은 자들을 입히고, 고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야 한다. 우리는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고취시켜야 한다.

이타적 봉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악을 행하는 자를 개혁시키는 일에 있어서 칼이나 공의의 법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일을 할 것이다. 칼이나 공의의 법정은 범법자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하여 필요하다.… 때로 견책 때문에 굳어지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을 것이다”(치료봉사, 104, 106).

“노예 제도와 계급 제도, 부당한 인종 차별,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등 이 모든 것은 비그리스도인적이고 인류의 복지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며, 주님이 교회에게 폐지하라고 명령하신 죄악으로 제시되었다.”-엘렌 G. 화잇의 장례식에서 그녀의 사역에 대한 A. G. 다니엘스 대총회장의 언급, 자서전, 4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세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단체는 많습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어떤 독특한 장점과 통찰, 자원들을 가지고 이런 사업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

※ 예수님의 일, 곧 마귀의 일을 멸하는 복음적 사명으로 이 사업에 기여해야 한다.

 

➋ 교회 공동체의 지원뿐 아니라 그 밖의 어떤 것을 통해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 스스로 말씀의 진리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요약 :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히 상처받고, 고통을 당하며, 억눌린 자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봉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런 일을 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교회 가족으로 함께 일할 때에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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