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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긍휼을 사랑하고(질문, 대답, 설명)09/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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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09-13 16:34 조회1,7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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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긍휼을 사랑하고

 

9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32분

 

● 연구 범위 : 마 6:25~33, 약 1:5~8, 2:15~16, 사 52:7, 요일 3:16~18, 사 58:1~10

 

● 기억절 :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시 112:4~5).

 

앞서 보았듯이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자신의 백성들에게 빈궁한 자들을 위해 일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이 명령은 단지 산발적이고 부분적으로만 성취되어 왔다. 그런 일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이후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난 뒤에야 완성될 것이다.

그때까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은 영적으로 어두운 감화력을 끼칠 것이기 때문에 불행은 여러 형태로 지속될 것이다. 그러한 불행은 종종 빈곤, 폭력, 억압, 노예제도, 착취, 이기심, 탐욕의 형태로 가장 뚜렷하게 가시화된다. 비록 그 일이 매우 힘들지라도 이 같은 세상에서 우리의 공동체와 교회와 가족들은 이러한 불행과 맞설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명령에 대해 반응하고, 예수님의 봉사와 희생의 모본을 따라 살며,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받아서 우리는 동정의 마음과 창조적인 정신 그리고 담대한 노력으로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미 6:8) 일을 추구해야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지향하는 방향과 다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우선시하며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함을 깨닫는다.

느끼기 : 주변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에 민감히 반응한다.

행하기 : 정의와 평화를 위해 마땅히 내야 할 목소리를 내고 해야 할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➋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행동에 나섰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성경의 교훈을 실천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한다.

➌ 우리가 평화의 대사라면 분쟁과 대립의 현장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이해와 동정으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➍ 이 사회에서 발언권이 없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실까요?

※ 대변하는데 지혜로운 봉사로 대변하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➎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 너무 많을지라도 주변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동정피로가 생길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봉사에 나설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➏ 정치적인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교회가 실천해야 하는 정의로운 행동은 무엇일까요?

※ 구제와 진실한 동정의 정신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론 :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회복이 완성될 때까지 세상은 더 큰 불행과 고통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나라의 가치를 묵묵히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선택이 안팎에서 반대를 당할지라도 우리는 관대한 삶을 실천하고 이 세상의 평화와 정의, 특별히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 담대하게 우리의 주장과 행동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9월 15일(일)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

 

예수님과 신약 성경 기자들의 가르침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살라고 택함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과는 다른 가치 체계와 우선순위에 따른다.

 

1. 마 6:25~33을 읽어보라.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보증은 무엇인가? 이러한 보증에 따라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마6:25~3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답: 새와 꽃도 먹이시고 기르시는 주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확실히 돌보신다고 보증하셨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우선순위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고 말씀하셨다.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비춰서 바라보아야 한다. 즉 우리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고 돌보라는 성경의 부르심을 인식할 때, 이런 부르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는 우리의 우선순위 중 하나가 된다. 이러한 부르심은 우리가 자신보다는 타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돕는다.

이렇게 뒤바뀐 우선순위들은 우리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이나 억눌린 자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능한 한 정부를 존중하고 그 방침을 따르라고 명령하지만(롬 13:1~7 참고), 다음과 같이 베드로의 말을 반영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예수님은 그분을 모함에 빠뜨리려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두 원칙 사이의 균형을 답변으로 제시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정부 또는 다른 영역에서 힘을 가진 자들은 종종 위협과 강제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 또는 유지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해서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인간의 법률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어긋날 때, 우리는 어떤 결과가 올지라도 후자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법률은 노예를 그 주인에게 넘겨주도록 요구하지만, 우리는 순종하지 말아야 하며, 이 법을 범한 결과도 감수해야 한다. 노예는 어떤 사람의 소유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정당한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그의 손에 넣고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교회증언 1권, 201~202).

 

<부가설명>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 이 세상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악한 세상이고 마귀가 예수님께 주장한 대로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이다. 예수님은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거짓을 말한다고 했다. 마귀는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이기 때문에 사망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불공평, 불평등, 고통, 압제, 질병, 범죄 등등은 사망의 부하들이다. 이런 환경에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아야한다. 그래서 부담이 많고 제약이 많고 고통이 많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른 나라 사람이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나라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아도 하늘나라 생활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명백하게 깨닫고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거듭났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첫째 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늘나라 방식대로 살줄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만나를 먹는 것도 아니다. 생명과를 현실적으로 배부르게 먹는 것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래서 삶이 어렵다. 사탄은 이런 그리스도인을 자기 부하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유혹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 마귀는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려고 집요하게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야 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선순위를 다르게 하는 삶이다. 

 

교훈 :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것이 정부의 뜻과 어긋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9월 16일(월) 동정 피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우리의 좋은 의도가 세상의 모든 환난에 압도될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저항하며 고통당하는 자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일에 더 힘쓰기를 원한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취할 수 있는 긍정적인 행동은 다양하다.

동정. 앞서 보았듯이 상처를 받은 자들의 고통을 인식하고 공감하는 것은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계이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민감성을 계발하고 유지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동정 피로’라는 개념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정서적인 에너지와 재정적인 후원을 요구하는 많은 이유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로감을 느낄 만큼 우리가 슬픔과 비극에 지나칠 정도로 노출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위의 불행과 고통을 예민하게 인지하면서도 동정심을 유지하셨다. 따라서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교육. 불의와 빈곤의 환경은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배우고 경청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도움을 주려다가 다른 사람의 삶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이것을 무관심의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되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사전 지식을 가지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이런 사업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기도. 문제를 보면 우리는 우선 실제적인 조치를 취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가 실제적인 조치임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 그리고 그들 위에 권한을 가진 자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딤전 2:1~2 참고). 또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더 나은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지도를 구할 수 있다(잠 2:7~8 참고).

기대감. 정치, 사회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이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적절한 기대감을 갖는 것은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사역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사람들에게 달리 가질 수 없는 선택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 되어야 한다. 때로 사람들이 이런 기회를 가지고 이룬 열매들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그러한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 우리가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행동 원칙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마 7:12)는 것이 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동정피로라는 용어가 있는 세상이 되었다. 딤후3:1~5에는 말세가 되면 무정하고 훼방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사납고 원통함을 풀지 않는 사회현상이 된다고 했다. 요즘은 아무나 동정하지도 못하는 세상이다. 생명의 위험, 또는 폭력의 위험 가능성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정도 잘 살펴서 해야 한다. 고속도로 옆에서 히치하이크를 하는 사람을 동정하여 차를 세웠다가 살해되고 차를 빼앗긴 사건이 미국에서 발생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들은 동정하지 말라고 권하는 시대이다. 히치하이크들에게 절대로 차를 세우고 태우지 말라고 한다. 무정해지는 시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기도하고 동정하는 일에도 교육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지혜롭게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은 방송매체들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동정의 호소를 하는가? 정말 동정피로가 쌓이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령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하면서 성경이 하라고 한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과 저자는 동정, 교육, 기도, 기대를 생각하라고 지도한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주변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않도록 그들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들에게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9월 17일(화) 관대함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너그러운 베풂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우리는 성경의 명령에 따라 소유를 나누며 재정적인 우선순위를 조정해야겠지만 관대함이란 그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상관없이 단지 한 번 돈을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실 관대함이란 시편 112편에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주요 특징이거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이다. “관대하며, 거저 빌려 주는 자에게 복이 찾아옵니다. 자기 일을 정의롭게 행하는 자에게 복이 찾아옵니다”(시 112:5, 쉬운성경).

 

1. 다음의 성경절들에서 곤궁한 자들에게 베푸는 관대함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레 25:35~37, 시 119:36, 고후 8:12~15, 요일 3:16~18, 딤전 6:17~19)

[레25:35~37]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36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37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시119:36]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고후8:12~15]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요일3:16~18]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딤전6:17~1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답: 가족과 친족을 돌보고 주위에 구하는 자들에게 마음을 닫지 말고 후히 도우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실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생활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삶을 통해 가장 온전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기독교 소망의 원천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죽음은 타인을 향해 우리가 관대한 삶을 살아야 할 동기가 된다. “나는 믿음 안에서 너희와 우리의 협력 관계가 그리스도를 위해 공유하는 모든 선한 일들에 대한 그대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효과적이기를 기도한다”(몬 6, NIV).

관대함이란 삶에 대한 크고 대범하며 포용적인 태도이다. 우리 개인의 삶뿐 아니라 우리 사회와 문화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최대한 움켜쥐라고 부추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대부분은 항상 나, 나, 나에게 스스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에 대해 죽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할 것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과 백성들의 선함과 상함을 동시에 보게 한다. 그리고 가능한 수준까지 궁핍한 자들을 돕게 한다.

삶의 한 특징인 관대함은 모금 행사나 자선 단체들에서 크게 환영을 받는다. 그 같은 관대함은 눈에 띄고 매우 실제적이다. 하지만 고액의 기부가 꼭 관대한 인생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막 12:41~44 참고). 관대한 삶은 그 어떤 기부보다 더 포괄적이며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관대한 정신을 존중하고 배양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관대함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죄 많고 이기적인 인간 본성으로 이끄는 힘에 개의치 않고 주도적이고 의도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표현할 필요가 있는 은혜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자신을 주신 사실에 근거하여 너그러운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너그러운 행동이 아니라 인격자체가 너그럽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너그러우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가지고 싶은 것이 많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기 어렵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여기라고 권고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살아가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많다. 그런데 여겨지는 것과 정말 필요한 것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고 여겨져서 사놓고 보면 실제로 별로 필요하지 않는 것이 많다. 나중에는 처리 곤란하게 쌓일 수도 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주님이 버리라고 하지 않으신다. 안식일이라도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네 자리를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그 자리는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너그럽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재림이 가까울 때에 관용(寬容)을 보이라고 했다. 관용은 너그러움이다. 재림성도들은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나를 포함해서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인색한 것을 고치게 해 주소서.

 

교훈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거저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아에 대해 죽고 타인에 대해 관대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와 동기가 된다.

 

 

9월 18일(수) 화평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1. 마 5:9을 읽어보라. 우리는 예수님이 여기서 하신 말씀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런 일에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는가?(막 13:7 참고)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답: 작은 것으로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아가서는 교회와 이웃들 사이에서 화평을 만드는 자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폭력적인 대립은 심각한 고통의 원인이 된다. 전쟁은 직접적인 피해자를 발생시키고 삶을 파탄낼 뿐 아니라, 인류의 필요를 채우거나 전쟁 생존자 또는 참전 용사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데 들여야 할 관심과 자원까지 군비확충에 쏟게 한다. 가정과 지역 사회에도 상처를 입히는 소규모 충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정의를 위한 열정은 화평하라는 명령을 간과할 수 없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중심부에는 죄 많은 인간을 창조주와 화해시키고 화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위대한 행동이 자리 잡고 있다(고후 5:18~21 참고). 우리는 우리가 받아 누리는 화해를 모본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화해의 대사가 되어야 한다.

 

2. 사 52:7을 읽어보라.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실천하는가?

[사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답: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으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한 가족의 화평을 가지도록 하라는 기별이다.

 

평화의 복음은 폭력적인 세상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우리의 동기, 모본, 근원이 된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하늘의 평화에 참여하는 자이며 그 복된 감화를 사방으로 널리 퍼뜨릴 것이다. 그러면 화평의 정신이 세속적인 투쟁으로 피곤하고 거칠어진 사람들의 마음에 이슬같이 내릴 것이다”(산상보훈, 28).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 5:9)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우리가 살인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확증하셨을 뿐 아니라 화를 내거나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되고(마 5:21~26 참고) 대신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5:43~48 참고).

이것은 우리가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위해 생애를 바친 이들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그들은 화해와 치유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이러한 대립이 야기하는 여러 불의와 고통을 경감시키기도 한다.

 

<부가설명> 우리가 봉사할 수 있는 범위를 너무 넓게 잡으면 부담으로 주저앉게 될 것이다. 전장(戰場)에서 참호 속에 있는 병사들을 향하여 적군을 전멸시키라고 명령할 때 한 참호 속의 군인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다. 전군에 내리는 명령이다. 참호 속에 있는 한 병사는 자기 시야가 미치는 부분만 바르게 담당하면 된다. 선악 간의 대쟁투도 같은 이치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내 역량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더 넓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은사를 더하실 것이다. 먼저 가정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고 다음은 교회에서 그렇게 하자. 다음은 이웃 관계에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전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역량의 한계가 있다.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더 겸손하게 더 온유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화평을 만드는 자는 자기 안에 화평이 충만해야 한다. 그가 예수 안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마음은 화평이 찰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무를 주셨다. (고후5:17~20) 성령께서 친히 주장해 주소서.

 

교훈 :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대립과 분쟁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평화의 대사가 되어 화해와 치유를 가져가야 한다.

 

 

9월 19일(목) 말 못하는 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사 58:1).

 

솔로몬은 우리가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전 3:7)다고 말했다. 맞다. 그러나 그러한 균형을 잡기란 결코 쉽지 않다. 반면 교회는 억압받는 자들과 말 못하는 자들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야 할 때 너무나 침묵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우리의 예언적인 역할에 따르면 우리의 우선적인 부르심은 그분의 음성이 되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분이 변호하기를 원하시는 자들의 편에서 말하는 것이다(시 146:6~10 참고).

 

1. 사 58:1~10을 읽어보라. 특정한 시기와 장소와 상황에서 주어진 이 기별은 오늘날 다른 시기와 장소와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사야가 이 말씀을 기록했던 당시와 오늘날의 세상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가?

[사58:1~10]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3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답: 내용의 뜻은 오늘날도 여전히 적용되는 기별이다. 인간의 본질과 그런 인간이 만드는 사회 환경의 본질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의를 추구하라는 선지자들의 호소는 결코 인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다는 동기와 정의를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에 대한 이해,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곤경에 대한 동정심, 최선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 등이 동기가 되어서 선지자들은 반대와 불편,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대와 사회에서 담대하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음성이 되었다(벧전 3:17 참고).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세상에 예수님을 반사하라는 부르심에 기초해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도 세상의 악을 해결하기 위해 제공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빈곤과 그것에 수반하는 불공정을 감소시키기 위한 행동들이 기독교인들의 사회적인 책무의 중요한 일부라고 믿는다. 성경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그분의 백성들이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자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기대치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며 그분이 주시는 복의 수혜자들이다(눅 6:20).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일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모본과 가르침을 따른다(마 25:35~36). 영적인 공동체로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를 지지하며 ‘말 못하는 자…를 위하여 입을 열’(잠 31:8)고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사10:2)는 자들을 반대한다. 우리는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시 140:12)는 하나님과 함께한다.” - 세계 빈곤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공식 성명, 2010년 6월 24일

 

<부가설명> 우리교회의 이런 사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아드라가 있다. 교회에는 도르가회, 즉 지역사회봉사회가 있다. 그러나 지역사회봉사회라는 명칭을 잘 살려서 활동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즘은 TMI 운동으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지역사회에 좋은 봉사를 하고 좋은 인상을 주는 것 같다. 좋은 일이다. 교회는 무상(無償)의 봉사로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했으니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봉사라야 받는 사람들이 참 봉사로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 진리교회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교회는 성경이 하라고 한 그 일을 일상적인 생활로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예수님의 일에 참여하는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봉사 이상이라는 뜻이다. 사회의 부조리는 마귀가 만들어놓은 환경이다. 예수님은 이런 환경을 태초에 창조하셨던 에덴동산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것이다. 마귀의 일이 멸하면 모든 부조리가 없어지게 된다. 그곳이 천국이다. 우리는 이런 봉사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 따에서 천국 일을 하는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음성이 되어 그들의 편에서 변호하기를 원하신다.

 

 

9월 2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치료봉사>, 503~516 ‘최고의 경험’, <교회증언 3권>, 511~526 ‘불행한 자들을 위한 의무’, ‘동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의무’, <교회증언 2권>, 24~37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함’을 읽어보라.

“하늘과 땅을 살펴보라.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진리는 우리의 동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의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황금률의 원칙을 실천할 때, 복음 사업에는 사도 시대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능력이 따를 것이다”(산상보훈, 137).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과 상호 간의 이기심 없는 사랑, 이것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이것은 충동이 아니요 거룩한 원칙이며 항구적인 능력이다. 성별되지 않은 마음은 이 사랑을 일으키거나 생산할 수 없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마음속에서만 이 사랑이 나타난다.… 마음속에 간직된 이 사랑은 생활을 유쾌하게 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품위 있는 감화를 끼친다”(사도행적, 55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이번 주 교과에서 보았듯이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동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동해야 함을 가리키는 견본과 동기가 되어왔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복음에 대한 그대의 생각과 이해를 어떻게 확장시켰습니까?

※ 선행과 봉사가 복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더욱 확인하게 되었다.

 

➋ 말 못하는 자들을 위해 음성을 높이고, 화평의 일에 개입하며, 그와 유사한 행동들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를 공공의 영역 또는 정치의 현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습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확고하게 고수해왔습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공적인 방식으로 화평을 위해 말하며 일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 정치를 비판하지 말고 인류해로서 주님의 정신을 수행하면 된다. 

 

요약 :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여러모로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거기에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관심에 참여하는 열의도 포함됩니다. 결코 쉽거나 인기가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관심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동기를 바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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