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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질문, 대답, 설명) 08/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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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08-17 05:32 조회5,1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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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지극히 작은 자 하나

 

8월 2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4분

 

● 연구 범위 : 마 5:2~16, 38~48, 롬 12:20~21, 눅 16:19~31, 12:13~21, 마 25:31~46

 

● 기억절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예수님이 다른 사람, 특히 상처받고 외면당하는 이들을 돌보는 생애를 사셨다는 사실을 보았기에 우리는 그분께서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많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러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 실질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분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행하셨던 공의와 친절과 자비의 행동을 실천하라고 촉구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모본을 따른다면 그분처럼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천국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 세계이다. 그것은 세상 나라와는 다른 체계의 우선순위와 가치와 도덕으로 작동하는 삶의 방식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나라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과 그분을 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사역이 곧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길임을 발견하게 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천국의 시민으로서 그 가치를 어떻게 이 땅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임을 이해한다.

느끼기 : 불우한 이웃을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의 동정과 긍휼의 정신에 공감한다.

행하기 :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돌보며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기로 결심한다.

 

➋ 예수님은 어떻게 그분을 섬기고 대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까?(마 25:31~46)

※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➌ 예수님이 가르치신 삶은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신앙에 어떤 변화를 요구할까요?

※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된 사람들이라야 그렇게 살게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➍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마 5:13~16)

※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착한 행실로 드러난다. 

➎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눅 10:30~37)

※ 우리 자신이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가늠하지 않아야 한다.

 

결론 :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현실적인 삶이 나눠져 있지 않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존재하는 삶의 원칙을 실천해 나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불우한 이웃을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들을 돌보면서 그분의 재림을 준비하기를 바라십니다.

 

 

8월 18일(일) 산상보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 또는 교훈집은 산상보훈이다. 세 장에 걸친 천국 생활의 조망은 팔복이라고 알려진 가치 진술로 시작한다.

1. 마 5:2~16과 눅 6:20을 읽어보라.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설명한 아홉 가지의 사람 또는 덕목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마5:2~16]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눅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답: 그 바탕이 가난하고 겸손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영적으로 적용할 뿐 아니라 현실적인 관점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빈곤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말씀하셨다. 그분은 또한 의(공의), 겸손, 자비, 평화 추구, 마음의 청결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러한 자질들이 실천될 때에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 가져올 실질적인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이해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촉구하신 예수님의 진술에서 더 두드러진다(마 5:13~16).

적합하게 활용된다면 소금과 빛은 그것들이 더해지는 환경에 변화를 가져온다. 소금은 풍미를 더하고 음식의 부패를 방지한다. 그것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실천되어야 할 선행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장애물과 위험들을 드러내며, 집이나 도시를 좀 더 안전하게 지키고,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가야할 길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어두운 밤을 비추는 등불처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셨다.

소금과 빛의 비유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어 그들의 삶을 향상시켜야 할 제자들의 책임을 가리킨다.

우리는 슬퍼할 줄 알며,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겸손히 행하며, 자비의 정신을 나타내 보이고, 평화를 추구하며, 압제를 견딜 때 소금과 빛이 된다. 즉 예수님은 종종 저평가되는 천국의 이러한 가치들을 구체화하라는 부르심으로 산상보훈을 시작하신 것이다.

 

<부가설명> 이미 몇 과에서인지 설명했지만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단순히 세상의 불공평과 권력자와 부자들의 횡포에 대하여 맞서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공부하면서 이런 문제의 배후에 있는 천국복음의 실체를 놓치면 안 된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태어나면서 장님이 된 사람에 대하여 제자들이 누구의 죄로 저렇게 되었는지 물었다. 부모의 죄? 아니면 본인의 죄? 예수님의 대답은 둘 다 아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 대답을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 병자를 치료하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는 것 등등은 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다. 요한은 요일 3:8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구절의 배후는 세상의 모든 비극과 불합리한 것들이 다 마귀가 해놓은 일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이런 봉사와 성경이 성도들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는 진정한 뜻은 예수님과 함께 마귀의 일을 멸하는데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을 빼먹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만 가르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그냥 도덕일 뿐이다. 이런 도덕은 이 세상에 많이 강조되고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 중에 훨씬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성경의 이런 기록들의 복음적 의미를 우리는 반드시 깨닫고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자.

 

교훈 : 산상보훈은 영적으로 적용해야 할 말씀일 뿐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현실에 적용해야 할 천국의 가치이다.

 

 

8월 19일(월) 선으로 악을 이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예수님의 가르침을 심사숙고할 때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셨던 대상과 그들이 살고 있던 형편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그분이 섬기는 지역으로부터 많은 군중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셨다(마 4:25, 5:1 참고). 그들 대부분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사는 평범한 자들이었고 일부는 유대인 통치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서민들의 삶은 고달팠다. 무거운 세금과 종교적인 전통에 억눌린 그들의 삶에는 별다른 선택 사항이 없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들이 자존감과 용기를 가지고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두셨다. 마 5:38~48이 하나의 예이다. ‘다른 뺨을 돌려 대라’, ‘셔츠도 벗어주라’, ‘몇 마일을 더 가라’ 등의 표현은 영어권에서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이러한 친근성은 예수님이 여기서 가르치시는 급진적인 행동이나 태도와는 모순된다.

예수님이 묘사하시는 상황은 그 당시 청중들이 흔히 겪는 경험이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상관 또는 주인들의 폭행에 시달렸다. 그들은 빚을 지고 지주와 채권자들에게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들은 종종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사들에 의해 노역장으로 끌려갔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진실함을 가지고 반응하며 압제자들에게 응분의 대접 이상으로 대접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잃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압제자들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 반응할지는 백성들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들은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되 관대한 방법으로 반응함으로써 자행되고 있는 압제와 불공정의 흉악성을 폭로했다.

 

1. 마 5:38~48과 롬 12:20~21을 비교해보라. 우리는 이와 같은 급진적인 원칙들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며 살 수 있는가?

[마5:38~4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롬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답: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께서 내 안에 살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선으로서 악을 이기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을 황금률이라고 알려진 단순한 원칙으로 요약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부가설명>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까?’(막10:17~22) 이때 예수님은 선한 이는 한 분뿐이니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이라고 하셨다.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생명은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이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는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데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이 생명이 된 사람들은 그렇게 살게 된다. 선으로서 악을 이기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망을 이기라는 복음적 의미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로 알려진 말씀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봉사한 삶은 예수님이 하시는 마귀의 일을 멸하는 그 일에 동참하되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役事)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가 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주장하는 예수님의 생명작용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생명력이 왕성하면 그렇게 살아지게 된다. 아버지여 이 생명이 날로 풍성하여지게 해 주소서.

 

교훈 : 급진적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존엄함을 잃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분의 삶의 방식을 반영한다.

 

 

8월 20일(화) 선한 사마리아 사람

 

1. 눅 10:25~27을 읽어보라. 예수님은 그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삶을 살기 위한 구약의 명령들을 두 명령으로 요약하셨다. 이 두 명령은 어떻게 서로 연관성이 있는가?

[눅10:25~2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답: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증명된다.

 

질문을 받고 내놓으신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자가 기대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레위기서의 명령을 가지고 당시의 백성들은 ‘이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논쟁하느라 많은 시간과 정열을 소모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말씀을 알고 있는 제자들의 이해력을 확장시키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단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도록 촉구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하지만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그 논쟁적인 질문을 꺼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러나 그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이웃’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예수님은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든지 가서 그의 이웃이 되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눅 10:36~37).

 

1. 눅 10:30~37을 읽어보라. 길에서 도움이 필요한 남자를 만난 세 인물을 대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눅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답: 종교적인 사람과 생명력이 있는 사람을 대조하여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흔히 예수님의 가장 호된 질책은 신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다른 이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자들에게 향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다 마시고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은 자로 간주되었던 한 주변인을 지목하시며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때의 청중들처럼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로 가서 그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부가설명> 우리는 이 율법사처럼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잘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누구의 이웃인가? 였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 되는 사람들이 내 이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모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웃이라고 하신다. 성도들은 그 신분이 선한 이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하다는 말은 도덕적인 말인 동시에 성경적인 말인데, 성경적으로는 선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고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두 강도만난 사람들이다. 이 사탄이라는 강도에게 상처입고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도들은 생명을 나누어주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다. 세상에서 부자든지 가난하든지 선하든지 나쁘든지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주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첩경이다. 그것을 우리는 전도라고 한다. 전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탄의 일을 멸하는 봉사이다. 우리의 신앙적 봉사가 이런 것임을 확실히 알고 생명의 봉사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교훈 : 예수님은 진정한 율법의 준수가 단지 종교적인 규례를 따르는 데 있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자의 이웃이 되는 것에 있음을 가르치셨다.

 

 

8월 21일(수) 부자와 나사로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 16:25).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예수님은 부자 한 명과 가난에 찌든 한 사람의 삶을 대조하셨다. 당시에는 사회 복지, 보건소, 무료급식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신체적인 제약이 있고, 불운한 자들은 부잣집 밖에서 구걸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소유를 조금이라도 나눠서 이웃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관대함을 보여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그 부자는 “고난 중에 있는 그 형제의 궁핍에 대해서 무관심했다”(실물교훈, 261). 사는 동안 그들 각각의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죽어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 그들의 위치는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1. 눅 16:19~31과 눅 12:13~21을 비교해보라. 이 두 이야기 사이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눅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2:13~21]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답: 같은 점은 결과가 거의 동일하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하나는 거지와 대조한 것이고 하나는 부 자체의 만족에 빠진 상태에 대한 것이다. 

 

이 두 이야기에서 그들이 어떤 잘못된 일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재산도 잘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 하나님, 돈, 이웃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점점 그릇된 방향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대가가 중대하고 영원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님 시대에 유행했던 사후 세계에 대한 비유에서 가져온 것이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생에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내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교훈을 가르친다. 우리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들에게 반응하는 방식은 우리의 선택과 우선순위의 방향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고통을 겪는 부자에게 지적하듯이, 성경은 올바른 선택을 위한 매우 적절한 방향을 제시한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29).

예수님은 돈을 벌고, 재물을 소유하며, 간수하려는 유혹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나라와 이웃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고 우리가 받은 복을 주위의 사람들,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라고 호소하신다.

 

<부가설명> 누가복음 12장의 비유는 재산을 나누도록 해 달라는 청을 듣고 재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의 결국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신 비유이고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세상의 부요함이 곧 천국을 얻는 정표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신 비유이다. 또 이 비유는 사람이 죽은 후에는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한 비유이다. 이 세상에서 재물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도구(道具, tool)이지 소유가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재물을 소유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재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고 가르친다. 도구는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집안에 도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우리에게 주신 이 도구를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소유라고 움켜쥐고만 있으면 영원한 나라에 이르는데 엄청 방해가 된다. 돈은 자기가 사용하는 것만 자기 것이 아니겠는가? 움켜쥐고 있어도 쓰지 않는 돈은 자기 것이 아니다. 갑자기 사고라도 당해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는 돈이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도 자기기 봉사하지 못한 돈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고 물으신 것이다. 우리의 도구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교훈 :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현재의 선택은 내세에 우리가 맞이할 영원한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8월 22일(목)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6).

 

마태복음 24~25장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질문에 일반적인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을 주신 사례가 또 나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언제인지 여쭈었다(마 24:1~3).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긴 답변의 결론은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며, 아픈 자들을 돌보고, 구속되어 있는 자들을 찾아가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언하시기를 ‘너희가 돕든지 돕기를 거절했든지 내 형제 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45 참고)고 하셨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물었던 제자들의 질문과 관련이 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시면서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끝에 관한 징조와 경고를 주셨고 한편으로는 재림의 약속에 비추어 ‘주의하며’ 바르게 살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마태복음 25장의 전반부에서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또는 지연된 재림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세 명의 종에 대한 이야기는 주인을 기다리며 진실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안내한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일로 바빠야 할지에 대해 훨씬 구체적인 교훈을 준다.

 

1. 마 25:31~46을 읽어보라.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무엇에 대해 말씀하시는가? 이것이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마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답: 이것은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조건으로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회복시키는 그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길 때 그것이 주님께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진술은 우리의 모든 관계와 태도에 적용되어야 한다. 한 끼의 식사를 예수님께 대접하고 그분이 병원이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분을 방문할 수 있는 특권에 대해 상상해 보라. 예수님은 우리가 지역 사회 주민들에게 그러한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놀라운 기회가 아닌가?

 

<부가설명>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설명했지만 오늘 내용이 마태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가 이 비유를 도덕적 삶에 적용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선한 일을 하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가난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ADRA가 아니라도 하는 기관이 많다. 세상은 재림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잘 돌본다고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구교회가 이런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구호활동은 신문에 크게 보도된다. 그러나 재림교회 아드라의 구호활동은 별로 보도되지 않는다. 천주교는 구원받는 조건으로 믿음과 선행을 말한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지 않으면 마치 선행이 구원받는 조건인 것처럼 생각되는 말씀이 많다. 그러나 구원의 복음을 바르게 알면 그런 생각은 말도 안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었고 그들의 삶은 썩어져가는 구습들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을 엄청나게 행해도 그것이 죽은 상태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유의 핵심은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생명력의 활동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생명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 선행이 구원을 주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선행해서 적선(積善)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선행이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활동이 그렇게 하는지 아니면 내 노력으로 천국행을 위하여 하는지 스스로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구원의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마귀의 일을 멸하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교훈 :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림을 기다리며 불운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웃을 돌보라고 권면하신다. 우리가 그들에게 한 봉사는 그분에게 한 것으로 간주된다.

 

 

8월 2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497~505 ‘선한 사마리아 사람’, 637~641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실물교훈>, 260~271 ‘부자와 나사로’, 376~389 ‘누가 내 이웃이오니까?’를 읽어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벽과 이기심과 민족 차별의 편견을 헐어버리시고, 모든 인간 가족을 위한 사랑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기심 때문에 달라붙어 있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모든 경계선과 사회의 모든 인위적 차이를 철폐하신다. 그분은 이방인과 이웃,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세상을 우리의 일터로 여기도록 가르치신다”(산상보훈, 42).

“황금률의 표준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교의 참 표준이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 기만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주실 만큼 귀중하게 여기신 인간을 낮게 평가하며 사람들을 경하게 여기도록 이끄는 종교, 인간의 궁핍과 고난과 권리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종교는 거짓 종교이다. 가난한 자들과 고난당하는 자들과 죄 많은 자들의 요구를 무시할 때,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임을 입증하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서 이처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의 생활에서는 그분의 성품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은 이런 일로 인해 모독을 받는다”(같은 책, 136~13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이번 주에 공부한 성경절 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각자 이야기해보자. 

 

➋ 우리에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진리를 올바르게 전체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닐까? 

 

요약 : 예수님의 가르침은 천국의 시민이자 대리자인 우리에게 특별한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라는 구약 성경의 강조점을 반복하며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인자와 자비가 넘치는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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