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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연합과 단절된 관계(질문, 대답, 설명)1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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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11-30 21:44 조회1,97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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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4분

 

● 연구 범위 : 딤후 4:11, 몬 1~25, 고후 10:12~15, 롬 5:8~11, 엡 4:26, 마 18:15~17

 

● 기억절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앞서 보았듯이 오순절 이후에도 신자들의 관계에는 때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여러 사례를 통해서 교회 지도자들과 각 신자들이 그와 같은 난관들을 처리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원칙들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매우 가치가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성경의 원칙에 따라 갈등을 해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유지할 때에 이르러 오는 긍정적인 결과들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에 영향을 미치는지와 회복된 관계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뿐 아니라 서로와 가까워지도록 인도하는 일을 포함한다. 그분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벽뿐 아니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도 허무신다. 요컨대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꼭 교회가 하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교인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교회의 연합에 대해 나누는 우리의 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관계의 치유와 유지에 필요한 개인의 자세가 무엇인지 배운다.

느끼기 : 단절된 관계가 영적인 성장과 교회 연합에 미치는 영향을 의식한다.

행하기 :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은혜와 용서를 베풀기로 결심한다.

 

➋ 바울과 마가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단절되었고 나중에 어떻게 회복되었습니까?

※ 마가가 전도 여행 도중에 돌아간 일로 바울의 눈 밖에 났으나 바나바의 노력과 성령의 역사로 바가는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되었고 바울이 자기가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연합했다.

➌ 빌레몬서의 교훈을 지금 시대에 적용한다면 ‘갑질’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➍ 교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조심하며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할까요?(마 18:15~17)

※ 예수님의 교훈을 명심하고 화목이 충고와 논의의 중심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➎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우리는 나를 위해서 용서해야 할까요?

※ 용서는 예수님의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며 정죄를 하지 않는 것이고, 용서할 때 자기에게 진정한 화평이 이른다. 

 

결론 : 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하시기 위해서 과도할 정도의 은혜와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것은 다시 인간관계의 회복과 치유의 동기가 되어야 하며, 그런 회복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 예증해 줍니다.

 

 

12월 2일(일) 회복된 우정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행 15:39).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업에 협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 마가처럼 겁이 많은 사람을 신뢰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 했다(행 15:36~39). 복음을 전하다가 당할 위험 때문에 요한 마가는 어느 시점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행 13:13).

“이러한 이탈은 바울로 하여금 한동안 마가를 나쁘게 생각하여 혹독하게 판단하게 하였다. 한편 바나바는 그가 경험이 없는 까닭이라고 그를 변명하였다. 그는 마가가 목회 사업을 포기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이는 그가 마가에게서 그리스도를 위한 유용한 일꾼이 될 자격이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었다”(사도행적, 170).

비록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사용하셨지만, 그들 사이의 문제는 해결되어야 했다. 바울은 은혜를 설교하는 사도로서 자신을 실망시킨 젊은 설교자에게까지 그 은혜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는 또한 용서의 사도로서 용서해야 했다. 요한 마가는 바나바의 긍정적인 조언을 받고 성장했으며(행 15:39), 마침내 바울의 마음도 그러한 변화에 감동을 받았다.

디모데와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 따르면 바울과 요한 마가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새로워졌는가? 그는 어떻게 그 젊은 설교자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는가? 골 4:10~11, 딤후 4:11

[골4:10,11]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답: 바울이 마가에 대하여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했다. 

 

성경은 바울과 요한 마가의 화해를 간략하지만 확실하게 기록했다. 요한 마가는 사도가 신뢰하는 동료 중 하나가 되었다. 바울은 요한 마가를 골로새 교회에 “동역자”로 추천했다. 생애의 끝 무렵에 바울은 “그가 나의 일에 유익”(딤후 4:11)하다고 말하면서 디모데로 하여금 요한 마가를 로마에 데려오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사도는 분명하게 그를 용서했던 것이다. 바울의 사역은 그 젊은 설교자로 인해 풍성해졌다.

그들 사이에 장애는 사라졌고, 그들은 복음 사업을 위해 협력할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든지 또 바울이 이전에 마가에게 보였던 자신의 태도를 얼마나 정당하게 생각했든지 상관없이 이제는 다 지나간 일에 불과했다.

 

<부가설명> 바울과 마가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때 헤어졌다. 바울은 마가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마가는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바나바는 달랐다. 그는 젊은 청년이 어려움에 부딪혀서 낙심한 것을 이해하고 그를 격려하여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도록 훈련시키면 헌신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바나바가 옳았다. 성경에 바나바 행전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는 초대 교회에 큰일을 했을 것이다. 마가를 일꾼으로 성장하게 한 것만도 큰일이다. 바울은 훗날 자기가 실수한 것을 깨닫고 마가와 공식적으로 화해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바울이 이전에 마가에게 보였던 자신의 태도를 얼마나 정당하게 생각했든지 상관없이 이제는 다 지나간 일에 불과했다.”는 교과 저자의 말은 과거가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의 상태로 과거를 묻어버린 것처럼 표현한 것은 합당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화해는 과거를 처리하는 것에 의하여 정당성을 가진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도 과거인 옛 사람을 처리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서로 주님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예수님 때문에 화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교훈 :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처럼 복음 사업을 하다가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우리는 용서와 은혜의 사도로서 서로를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12월 3일(월) 종에서 아들로

 

“너희는…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로마에서 감금되어 있던 때에 바울은 골로새에서 로마까지 도주한 노예 오네시모를 만났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빌레몬서는 도망한 노예와 관계를 회복하라고 호소하기 위해 바울이 친구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신이다.

관계는 바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사도는 관계의 균열이 영적인 성장과 교회의 연합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다. 만약 그가 오네시모에 대하여 악한 감정을 품는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지역 사회에 대한 그의 증언뿐 아니라 그 교회의 증언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1. 몬 1~25을 읽어 보라. 관계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은 무엇인가? ‘원칙’이라는 말이 중요함을 기억하라.

 

답: 각자가 성경본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빌레몬 전체 내용이다. 원칙은 용서와 화목이다. 

 

언뜻 보기에 바울이 노예 제도의 부당성에 대하여 강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소 놀랍다. 그러나 바울의 전략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상적인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계급적인 차별을 허문다(갈 3:28, 골 3:10~11). 사도는 노예가 아닌 예수님 안에서 새로 얻은 그의 아들로서, 또한 주 안에서 빌레몬에게 “사랑 받는 형제”(몬 16)로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냈다.

도망한 노예의 미래는 암담했다. 그들은 언제 체포될지 몰랐으며 궁핍과 가난의 삶을 살 게 뻔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의 형제이자 적극적인 동역자가 된 오네시모의 미래는 밝았다. 그는 빌레몬의 보호 아래서 음식, 잠자리, 직업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파괴된 관계의 회복은 삶의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오네시모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골 4:9)이자 바울과 함께하는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다. 바울은 둘 사이의 관계 회복을 너무도 열렬하고 확고하게 바란 나머지 예수님을 믿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금전적인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라도 해결하려고 했다.

 

<부가설명>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건을 다룬 빌레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의 차이 없이 한 형제가 된다는 사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그는 주인의 집에서 도망가서 로마에 갔다.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이다. 로마에서 방황하던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결과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모든 그리스도인과 형제관계가 형성되었다. 육신적으로 상전이었던 빌레몬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빌레몬에게 강하게 상기시키면서 오네시모 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빌레몬과 바울에게 다 유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오네시모의 뜻이 유익하다는 뜻이다. 기원 110년경에 순교한 익나티우스가 에베소교회에 보내 편지에 에베소교회에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감독이 있는데 ‘한없이 자비로운 너희 감독 오네시모’라고 썼다. 그가 빌레몬서의 오네시모가 아닐까 하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의 표상이 되었고 주님의 일꾼이 되어 충성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훈 :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회복은 때로 사회적인 신분 또는 계급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기 때문이다.

 

 

12월 4일(화) 연합을 위한 영적인 은사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이전 과에서 보았듯이 고린도 교회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1. 바울은 교회 연합에 필수적인 치유와 회복의 원칙을 어떻게 요약했는가? 고전 3:5~11, 12:1~11, 고후 10:12~15

[고전3:5~11]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12:1~1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후10:12~15]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량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답: 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집이요, 한 성령으로 받은 은사며, 한 복음을 받은 자이다. 

 

사도는 위의 성경절들에서 교회 연합에 필수적인 원칙들을 요약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다양한 일꾼들을 사용하셔서 다양한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시되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함께 일하도록 하신다(고전 3:9).

하나님은 우리를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부르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고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협력하도록 각 신자에게 은사를 주신다(고전 12:11). 은사에는 경중이 따로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모든 은사가 필요하다(고전 12:18~23).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이기적인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업을 위해서 은사를 부여하신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태도는 지혜롭지 못하다. 그런 자세는 스스로를 낙담시키거나 교만하게 할 뿐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에 그들이 ‘나’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쉽게 실의에 빠지고 어떤 사역을 하든지 의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이 하는 일보다 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자만하게 될 것이다. 자만심은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가짐이다.

두 가지 태도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유용성과 우정을 저해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주신 감화력의 범위 안에서 일할 때, 우리는 그분을 위한 우리의 증언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다른 신자들의 노력을 보완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분의 나라를 위한 거대한 진전을 이룰 것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인종이 된다. 이 인종은 개개인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이다. 이렇게 하나 된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으로 호흡한다. 성경은 그것을 한 성령을 마신다고 표현했다.(고전12:13) 물론 마신다는 원문이 호흡한다는 말이 아니고 마신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성령을 생수로 비유하신 것을(요7:37~39) 이해하면 마신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다 같이 한 반석 위에 세워지고 다 같이 한 성령으로 살아간다면 사상과 언어와 감성이 통일 되게 되어 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방법이 다를 수 있어도 그것이 지체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의견과 방법이 예수님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면 서로 협력하고 양보하며 가장 좋은 것을 시도하고 시도해 보는 중에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면 또 다른 의견과 방법을 실시해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가장 좋은 길을 함께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의견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분열되고 적대관계가 되면 그리스도의 몸을 허는 것이다. 

  미국인 교회에서 직원회를 하다가 의견이 충돌하여 과열이 되는 기미가 보이면 의장인 담임목사가 잠깐 토의를 멈추고 ‘우리 다 같이 기도한 수에 다시 의논합시다.’라고 말하고 누군가를 소리 내어 기도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의논한다. 미국인 교회에서 의논하면서 큰소리치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아보였다.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성령의 방법이 아닐까?

 

교훈 :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각 다르지만 우리는 자신의 은사를 통해 봉사함으로써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모두 연합하게 된다.

 

 

12월 5일(수) 용서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우리에게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행동을 정당화하는가? 나의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에 달려있는가? 나를 분노하게 하는 사람이 용서 받을 자격이 없다면 어떠한가?

 

1. 다음의 성경절들에 따르면 성경이 말하는 용서의 본질은 무엇인가? 롬 5:8~11, 눅 23:31~34, 고후 5:20~21, 엡 4:26

[롬5:8~1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눅23:31~34]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고후5:20,21]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답: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용서의 근본이고 예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내가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해 지기 전에 실천하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신다. 우리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롬 2:4).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했다. 우리의 회개와 자백이 화해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것을 이루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루실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까지 용서의 복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자백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용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이미 그분의 마음속에 있었다. 자백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그 용서를 받아들이게 할 뿐이다(요일 1:9). 자백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라고 우리를 설득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에 굴복할 때, 우리는 변화를 경험한다.

용서는 또한 우리의 영적인 안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비록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이 용서받을 자격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들보다 ‘내 자신’이 더 큰 상처를 입는다. 누군가 그대에게 잘못을 했는데 그대가 용서하지 않아 그 상처가 안에서 곪아 터진다면 그로 하여금 그대를 더 괴롭히도록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 안에서 그 같은 감정과 상처 때문에 불화와 긴장이 생긴 적이 얼마나 많은가? 교인들 사이에 아물지 않은 상처는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에 상처를 입힌다.

용서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처럼 누군가를 우리의 정죄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그 사람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잘못할 때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화해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과 화해할 수 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선택에 달렸다. 우리는 그 사람의 행동과 태도와 상관없이 용서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정신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여 용서를 받았다는 증명은 나에게 허물진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 가르치신 비유에서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용서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면서 우리가 충심으로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것이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정신은 마귀의 궤계(詭計)에 빠지는 것이라고 하였다.(고후2:10,11) 용서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대신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생명을 주셨다. 가장 큰 용서가 아닌가? 이런 용서를 실감한다면 내게 100 데나리온 허물을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잘못한 사람의 태도는 주께서 알고 해결하실 것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주님 안에서 하면 된다. 아메.

 

교훈 : 용서란 그 사람을 나의 정죄에서 놓아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화목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다.

 

 

12월 6일(목) 회복과 연합

 

1. 마 18:15~17을 읽어 보라. 다른 교인이 잘못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은 어떤 3가지 단계를 제시하셨는가?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해야 하는가?

[마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답: 우리도 이 원칙을 따라 실행하면 된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8장에서 주신 조언의 취지는 교회 내에서 벌어진 개인 사이의 문제는 가급적 작은 범위에서 다루라는 것이다. 먼저 당사자 두 명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고 말씀하셨다. 둘 사이의 문제에 개입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논란은 더 가중되고 다른 신자들의 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쪽저쪽 편을 들면서 전선(戰線)이 형성된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상호이해의 정신으로 그들의 의견 차이를 내려놓는다면 화목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우리가 서로 의견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에 적합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나 갈등 해소를 위한 개인적인 호소가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다. 예수님은 그런 경우에는 한두 사람을 동반시키라고 권유하신다. 화해를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 단계를 거친 다음에 진행해야 한다. 목적은 서로를 가깝게 하려는 것이지 더 멀리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 측에 속한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은 그들의 입장을 주장하거나 상대측을 비난하는 일에 가담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서로 관계가 소원해진 두 사람을 화합시키는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조언자요 기도해 주는 동료로서 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할 경우도 있다. 예수님은 그럴 때면 그 문제를 교회 앞으로 가져가라고 지시하셨다. 물론 개인적인 갈등의 문제로 인해 안식일 예배 시간을 방해하라는 말씀은 아니다.

앞선 두 단계가 양측을 화해시키지 못했을 경우에 문제를 다룰 적합한 자리는 교회 직원회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목적은 화목이다. 이것은 한쪽을 정죄하고 한쪽은 무죄를 밝혀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부가설명> 개인 문제가 교회에 제출 되면 그것은 교회 행정문제가 된다. 교회 행정의 제1원칙은 인화(人和)이다. 문제가 생긴 쌍방 간에 화목을 이끌어내는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쌍방의 사정을 다 들어본 후에 교회가 어느 한 편을 지나치게 옹호하면 안 된다. 물론 올바른 판단으로 결론에 이르러여 하겠지만 예수 안에서 한 형제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본분을 상기시키고 그 원칙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성령의 지혜와 인도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마18:18) 형제들 사이의 분쟁과 반목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만나서 충분히 대화를 하고 오해는 풀고 용서할 것은 예수님 정신과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연합하도록 피차 예수님께 굴복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지체들이 되어야 한다. 가능하면 해 지기 전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성경적이다. 

 

교훈 : 우리는 교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단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다른 신자 또는 교회의 개입은 당연히 화목과 연합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12월 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일꾼들이 그들 영혼 속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실 때, 모든 이기심이 죽고 경쟁의식이 사라지며 으뜸이 되기 위하여 다투지 않고 일치단결의 정신을 앞세울 때, 또한 그들 스스로 성결케 하여 서로 사랑하는 정신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될 그때, 하나님의 허락은 추호도 틀림없이 성취되어 성령의 은혜의 소나기가 분명히 내리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75).

“우리가 여호와의 큰 날에 우리의 피난처시요 높은 망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서고자 한다면, 모든 시기심과 최고가 되고자 하는 모든 다툼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이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 편에 두어야 한다”(마지막 날의 사건들, 19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골 3:12~17을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어떤 그리스도인의 자질들을 갖추라고 권면했습니까? 이런 자질들이 모든 갈등 해소의 기초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자질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마 18:15~18에서 주신 원칙들을 이행할 수 있습니까?

※ [골3:12~17]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긍휼, 자비, 겸손, 인내를 옷입는 것이다. 이런 은사를 누리게 되면 예수님의 교훈은 당연히 실천된다.

 

➋ 골 3:12~17과 그 교훈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이것들이 교회의 연합에 그토록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그리스도의 지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➌ 재림교회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연합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르침이나 교리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세상에 전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아마도 문제는 우리의 인간관계, 사소한 시기심, 다툼, 이기심, 높고자 하는 욕망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연합을 보기 위해 먼저 ‘내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진정으로 거듭난다면 예수님의 생명이 그를 주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한다. 이것이 바울이 갈2:20에 고백한 내용이다. 

 

요약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치유와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생기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 죄 많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다른 사람과 아름답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훌륭한 원칙과 모본들을 주셨습니다.

댓글목록

진성수님의 댓글

진성수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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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

컴퓨터가 문제를 일으켰는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이라서 오늘에야 인터넷이 되는 곳에 와서 다시 올립니다. 잠시라도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늘 이용하시는 성도님들에게 감사합니다. 말씀 안에서 함께 은혜 누리게 되면 주님께 영광이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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