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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바울의 1차 선교여행(질문, 대답, 설명)08/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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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8-11 07:37 조회6,5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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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1분

 

● 연구 범위 : 행 13장, 고후 4:7~10, 롬 10:1~4, 롬 3:19, 행 14:1~26. 롬 9~11장

● 기억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복음이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초기 유대인 신자들은 비록 더뎠지만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방인들이 대규모로 기독교 신앙에 연합하고 있다는 최초의 보고는 안디옥에서 들려왔다. 즉 안디옥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다. 물론 그 교회에는 유대인 신자들로 구성된 대규모 파견단이 와 있었다(갈 2:11~13 참고). 설립자들의 선교적인 열성과 바나바와 바울의 합류로 더해진 새로운 추진력 덕분에 그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해서 유대 이외의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기독교 선교 중심지가 되었다. 사실 몇 가지 측면에서 그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역량을 넘어섰다.

사도들이 머무는 예루살렘과 더불어 안디옥교회는 기독교 선교의 본산이 되었다. 바울이 세 차례에 걸쳐서 선교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먼저 그곳 신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독교가 예수님이 계획하신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도 그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선교의 장소와 목표와 방법들에 대해 살펴본다.

느끼기 : 선교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의지한다.

행하기 : 지역 교회의 선교 사업에 동참한다.

 

➋ 성령님이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선교사로 세우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행 13:2)

※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곧 이방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이다. 

➌ 왜 엘루마처럼 진리를 일부만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 어려울까요?(행 13:8)

※ 일부만 아는 그것이 고정관념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➍ 바울의 어떤 기별 때문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반응에 차이가 생겼을까요?(행 13:45, 48)

※ 바울은 구원받기 위하여 유대인이 되어야할 이유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기별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유대인의 사상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➎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맞이한 놀라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습니까?(행 14:8~18)

※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려고 했다. 

 

결론 : 선교의 성공은 성령께 의지함, 교회의 지원, 선교인들의 헌신에 달려 있습니다.

 

 

8월 12일(일) 살라미와 바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

 

사도행전 13장에서 누가는 안디옥으로 시선을 돌려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을 소개한다. 그는 13장과 14장을 할애해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을 다룬다. 여기서부터 마지막까지 사도행전은 바울과 그의 이방인 선교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한 교회가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수립한 최초의 선교적인 시도이다. 그러나 누가는 그 같은 시도가 신자들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강조한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는 위치에 기꺼이 우리 자신을 둘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

 

1. 행 13:1~12을 읽어 보라. 바나바와 바울이 구브로에서 펼친 활동에 관하여 누가가 강조하려고 하는 요점은 무엇인가?

[행13:1~12]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답: 먼저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와 금식으로 헌신하였고 성령께서 일꾼을 지적하여 임명하시고 그들의 복은 선교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과 복음은 양 극단적인 반응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수용과 반대이다.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에 그 교회는 중보의 기도와 금식의 시간을 보냈다. 이 상황에서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성별의 의식 또는 맡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에 위탁하는 의식이었다(행 14:26).

구브로(키프러스)는 안디옥에서 멀지 않은 지중해 북동부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섬이다. 바나바가 그곳 출신이었고 그곳에 이미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구브로는 선교 여행의 첫 경유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구브로 살라미의 한 회당에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의 조카 요한 마가가 함께 복음을 전했다(행 13:5). 이방인에게로 향하기 전에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관례였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살라미를 떠나 서쪽으로 이동하며 아마도 계속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그 섬의 중심 도시인 바보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두 인물 곧 엘루마라고 불리는 유대인 마술사 바예수와 그 지방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복음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과 마주하는지에 관한 좋은 사례를 제시한다. 복음은 한편에서는 노골적인 반대를 당하고 한편으로는 최상류층 이방인들에게 진실한 환영을 받는다. 행 13:12의 언어는 분명히 회심을 암시한다.

 

<부가설명> 선교활동은 활동하는 당사자에게만 의탁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는 성령께서 이끄셔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교회가 연합하여 간구하고 기도와 재정적 후원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이런 연합과 절차는 완전히 성경적이다. 개인이 교회와 관계없이 선교활동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교회와 연합하고 기도와 재정의 후원을 받으며 함께 성령의 지도를 간구하는 것은 성경에 제시한 선교활동 방법이다. 선교가 필요한 지역에 전도 팀을 파송할 필요를 느낄 때는 온 교회가 마음을 합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안디옥 교회처럼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성령의 인도를 간구할 때 가장 합당하게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그래서 파견선교사와 후원선교사가 함께 일해야 한다.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하였다. 안디옥 교회로 본을 보인 이 방법과 절차는 오늘날 선교하려는 사람들과 교회가 따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교훈 :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게 하셨다. 그들은 구브로 섬에 도착하여 살라미에서 바보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다.

 

 

8월 13일(월) 비시디아 안디옥 1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행 13:38).

 

바울과 동료들은 구브로에서 나와 오늘날 터키 남부 해안에 위치한 밤빌리아의 버가로 항해했다. 그들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기 전에 누가의 기록에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먼저 바울이 지도자로 나선다. 이전에는 바나바가 먼저 언급되었다. 그다음 누가는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을 더 이상 쓰지 않고 ‘바울’만 사용한다. 아마도 그때부터 계속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 활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행 13:13을 보면 요한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사도행전만으로는 마가가 이탈한 이유를 알기 어렵다. 엘렌 G. 화잇에 따르면 앞에 놓인 곤경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낙담에 빠진 “마가는 더 큰 어려움을 우려하고 겁이 나서 용기를 완전히 잃어 앞으로 나아갈 것을 거절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행적, 170). 하나님은 선교 사업이 쉬울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한 봉사에 고난도 따르리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다(행 9:16). 그러나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법을 알았다. 그의 능력의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후 4:7~10).

 

1. 행 13:38을 읽어 보라.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전한 기별은 무엇인가?

[행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답: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얻는다는 기별이다. 

 

행 13:16~41은 신약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바울의 설교이다. 물론 그것이 바울의 첫 설교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 설교의 간략한 요약이다.

그의 설교는 3부분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다윗의 왕위에 대해서 다룬다(행 13:17~23). 이는 유대인 청중들과의 접촉점을 형성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다음에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다윗의 후손이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성취로 제시한다(행 13:24~37). 마지막은 예수님을 통해 제공된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행 13:38~41).

설교의 절정은 38절과 39절이다. 거기에는 핵심적인 칭의의 기별이 담겨있다. 죄 사함과 칭의는 모세의 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의 설교는 율법이 철폐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율법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칭의를 베풀 능력이 없음을 강조한다(롬 10:1~4). 그 같은 특혜는 오직 예수님만 주실 수 있다(갈 2:16).

 

<부가설명>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다. 거기는 유대교인들이 유대인들이 모인 장소이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전하였다.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힘입어 의롭다함을 얻는데 이유는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이 죽는 것으로 끝났다면 예수를 믿어도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요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교회에 아무리 다녀도 예수님을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구원과 상관없는 상태에 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서는 죄에 대하여, 사망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예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이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리를 기록하기 전에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이 기별을 전하였다.

 

교훈 : 선교의 길은 고난을 포함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는 그것을 극복할 힘을 얻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대범하게 전할 것이다.

 

 

8월 14일(화) 비시디아 안디옥 2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행 13:38~39은 우리가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도덕적인 계명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을지라도 율법은 그것을 준수하는 자 안에 완전한 순종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칭의를 가져오기란 불가능하다(행 15:10, 롬 8:3). 설령 율법이 우리 안에 완전한 순종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완전한 순종이 과거의 죄까지 속량하지는 못한다(롬 3:19, 갈 3:10~11). 칭의가 부분적이라도 획득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속죄 희생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칭의를 얻을 수 있다(롬 3:28, 갈 2:16). 그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순종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1. 행 13:42~49을 읽어 보라. 그 회당은 바울의 기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행13:42~49]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답: 온 성이 모여 바울의 기별을 듣고 이방인들은 이뻐하였고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반대하였다. 

 

바울이 다소 거친 방법으로 설교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회당에서 그의 기별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다음 안식일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복음의 기별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은 아마도 공식적으로 유대교를 대변하는 그 회당의 지도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가는 바울에 대한 그들의 무례한 태도를 시기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대교의 일신론, 생활방식, 안식일 같은 몇 가지 요소들은 고대 세계의 비유대인들에게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유대교로 전향했다. 그러나 할례가 큰 걸림돌이었다. 그것은 야만적이고 혐오스러운 행습으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많은 이방인들이 회당 예배에는 참석했지만 정식으로 유대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알려졌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아마도 ‘전향자’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행 13:16, 43). 그들은 큰 무리가 되었다. 먼저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별은 많은 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울을 시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무튼 그들은 복음을 거절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에서 자신들을 배제시켰을 뿐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계획에 자신들을 포함시키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기뻐했다.

 

<부가설명> 잘못된 진리를 성실히 믿고 그 이론에 깊이 젖어 있으면 성경의 진리를 전할 때에 젖어있는 오류 때문에 진리가 스며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반대하게 된다. 어디 진리의 샘물이 스며들 자리가 있는 자들은 목마른 자들이고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르고 확실한지 끊임없이 시험하고 확증하는 자들이다.(고후13:5) 우리도 우리의 믿는 도리가 성경에 의하여 올바른지 끊임없이 시험하고 확증하는 삶이 필요하다. 그렇게 지나치게 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흐르면 그것도 대단히 위험하지만 성경말씀 앞에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오직 말씀으로 증거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간구하면 성령께서 성경의 바른 진리로 이끄실 것이다. 성경이 나타내지 않는 것을 알려고 억지로 성경을 풀면 안 된다. 때에 대한 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다. 그런데도 때에 다한 것을 자꾸 들고 나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명백한 것을 희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탄의 함정이다. 

 

교훈 :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 바울의 기별은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샀지만 이방인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었다.

 

 

8월 15일(수) 이고니온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지도자들의 선동 아래 지역 관리들은 군중을 동원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마을에서 내쫓았다(행 13:50). 그러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였다(행 13:52). 그 선교사들은 그 후 이고니온으로 향했다.

 

1. 행 14:1~7을 읽어 보라. 이고니온에서 펼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행14:1~7]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답: 많은 유대와 헬라의 무리가 복음을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핍박했고 두 사도는 도망하여 루가오니아 두 성인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에 가서 복음 전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이방인들에게 향하기 전에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의 안디옥 설교(행 13:16~41)를 보면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주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안에 포함된 제반사(諸般事, 롬 3:2, 9:4~5) 그리고 다윗의 혈통에서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 때문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있음에도 바울은 엄청난 유대인 무리의 회심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로마서 9~11장을 보면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롬 9:6)라고 단언한다. 즉 일부 유대인들이 믿는 것도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롬 11:5)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언젠가 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전개한 논증은 그가 사도행전의 기사 속에서 추구했던 선교 전략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며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신학적인 의미를 제시한다.”—David G. Peterson, The Acts of the Apostles (Grand Rapids: Eerdmans, 2009), p. 401.

이고니온의 상황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반응은 모두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불신 집단은 이방인들까지 선동하여 선교사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 했고 결국 백성들 사이의 분열을 야기했다. 반대자들의 공격 계획을 알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을 떠나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부가설명> 바울이 전도한 지역의 반응을 보면 반대하는 자들이 주로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특권을 받은 자들이다.(롬3:1) 그들은 말씀을 늘 외웠고(행13:27) 기억하였고 경문을 차고 옷단에도 말씀을 써서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말씀의 복음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재림기별은 기성 기독교인들이 가장 반대한다. 옛날 유대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지 않을 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받지 못하게 한다. 바울과 바나바가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 이름을 부르지만 진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먼저 전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그래도 성경을 아는 편에 속하니까 말하기가 쉽지 않을까? 결과는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전하는 재림교인이 자기가 믿는 바를 바울처럼 확실히 알고 확실히 설명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신도들이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믿는 바를 확실히 증거할 수 있도록 교육이 거의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분발하자. 

 

교훈 : 이고니온에서도 두 증인은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반대는 복음을 다른 곳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8월 16일(목) 루스드라와 더베

 

바울과 바나바가 방문한 다음 장소는 이고니온에서 남서쪽으로 약 29km 떨어진 두메 루스드라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며칠을 보냈지만 누가는 한 절름발이의 치유를 둘러싼 일화만을 소개한다(행 14:6~7, 15).

 

1. 행 14:5~19을 읽어 보라.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러한 반응은 그들이 얼마나 무지에 싸여 있는지를 보여주는가?

[행14:5~19]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답: 바울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낫게 하자 그 지방 사람들이 신들이 사람 형상으로 방문했다고 하며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하여 제우스 신당 제사장이 소를 가지고 제사하러 왔다. 그 지역 사람들의 모습은 신앙과 종교에 대하여 전혀 이성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드러내었다. 

 

군중은 그 기적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착각했다. 바나바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높은 제우스라고, 바울은 제우스의 신하이자 대변인인 헤르메스라고 오해했다. 심지어 그들은 두 사도에게 제물을 바치려 하기까지 했다.

앞서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 43 B.C.-A.D. 17/18)는 두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쉴 곳을 찾으려고 그 지역의 한 마을(프리기아 언덕)을 방문했다는 전설을 기록했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노부부는 그들을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이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익명의 방문자들에 대한 그들의 친절과 환대로 인해 그 노부부의 집은 성전으로, 그들은 제사장으로 탈바꿈한 반면 마을의 다른 곳은 완전히 파괴되었다.—Metamorphoses 611–724

그러한 설화가 퍼져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바울의 기적에 대하여 그같이 반응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그 설화를 통해 백성이 두 선교사를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아닌 제우스와 헤르메스일 것이라고 추측했던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경배하려는 그들의 행위를 중단시켰다. 심지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일부 반대자들 때문에 상황이 급반전되어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 자처럼 버려졌다.

 

2. 행 14:20~26을 읽어 보라. 그들은 어디서 선교 여정을 마쳤으며, 돌아가는 길에 무슨 일을 했는가?

[행14:20~26]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답: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버가, 그리고 다시 처음 떠났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교회에 선교보고를 했다. 오는 길에 전도한 교회들에 장로들을 세웠다. 

 

<부가설명>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신의 영향으로 신화와 전설을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 외에 사람보다 능력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한 말처럼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을 소개하면서 살아계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다. 그러나 워낙 신화와 전설, 심지어 그 신화에 등장하는 신전을 짓고 거기 제사장 노릇까지 한다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어려울 것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과 구원의 주 예수님을 소개했지만 받아들여 믿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영생 얻기에 합당한 사람들은(행13:48) 다 예수님을 믿었다.

 

교훈 : 사도들은 거짓 신화에 젖어 있는 무지한 이들에게 죄를 속량하시는 구속주이실 뿐 아니라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전했다.

 

 

8월 1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에 유대인들을 그들의 배타주의에서 끄집어내려고 노력하셨다. 백부장과 뵈니게 여인의 회심은 이스라엘로 인정되는 지역 이외의 백성들에게서 이루신 그분의 직접적인 사역의 예였다. 이제 이방인들 가운데서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사역을 펼칠 때가 된 것이다. 모든 무리가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지적인 믿음의 빛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유대인들의 불신과 악행이 하나님의 목적을 바꾸지 못했다. 왜냐하면 늙은 감람나무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싹텄기 때문이다. 회당들은 사도들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의 집들은 활짝 열렸고 이방인들의 공공건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엘렌 G. 화잇, Sketches From the Life of Paul, 51).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모든 선교적인 노력에 있어서 영혼을 위해 자원하여 희생하시고 충성스럽게 열심으로 수고하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방심치 않고, 열심히 끈기 있게 개인적인 기호나 안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경건한 염원과 끊임없는 활동으로 진리의 씨를 뿌렸다. 씨를 뿌림에 있어서 사도들은 복음에 확고히 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귀중하고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자 주의하였다. 이 열렬하고 거룩한 근심의 정신은 새로운 제자들의 마음에 복음 기별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감명을 끼쳤다”(사도행적, 18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선교 여행 중 이탈한 요한 마가에 대해 더 묵상해 보십시오. 후에 그가 다시 선교 여정에 동행하려고 했을 때 바울과 바나바가 논쟁을 벌인 일화도 있습니다(행 15:37). 하지만 몇 년 후에 바울은 그의 유용성을 인정했습니다(딤후 4:11). 이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때로 사역에 불성실한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 인내로 그런 사람이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도우는 것은 주님의 종들이 갖추어야 할 심성이고 태도이다. 이점에 있어서 바울은 바나바를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바나바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도 바나바의 심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➋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신처럼 숭배를 받을 뻔했던 사건처럼(행 14:14~18)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치 내가 한 일인 것처럼 영광을 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 바울과 바나바가 나타낸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어야 한다. 성경의 위인들은 자기를 높일 수 있는 어떤 기회라도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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