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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제자도의 개관(槪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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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2-25 14:00 조회6,6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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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제자도의 개관(槪觀)
1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27분)

도입)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회를 담임하시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uan Carlos Ortiz) 목사님의 저서 가운데 “Disciple”이 있다. 그 책 저자의 서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성령께서 나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분의 첫 말씀은 이것이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 스트사가 잡지와 책을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어디에서 나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 라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다음에 주님은 두 번째의 말씀을 하셨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 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교회를 수적으로 많은 사람으로 채울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억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8-19).

연구 범위: 마 4:18-22, 10:24-25, 막 3:13-14, 8:34-35, 눅 14:25-26.

중심 사상: 제자도란 무엇인가? 누가 제자인가? 자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제자가 되기 위한 자격 조건은 무엇인가? 제자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안식일 오후
스티븐슨(Dwight E. Stevenson)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할 당시의 한 일화를 통해 제자도의 중요한 측면을 설명해 주었다. “꼬르떼즈(Cortez)는 500명의 자기 부하들을 멕시코 동부 연안에 상륙시킨 다음, 배에 불을 질러버렸다”(찰스 L 월리스 편, 특별한 날을 위한 설교 예화, 베이커 북 하우스, 1975년, 25).
정복자들은 그들이 퇴각할 수 있는 수단인 배가 불꽃에 휩싸인 것을 바라보며, 조국 스페인을 위해 신대륙 정복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그 일에 전적으로 헌신해야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제자의 사역에 몸 바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항구에서 배를 불살라버려야 한다. 우리에겐 물러설 여지가 없다. 돌아갈 길은 없다. “후퇴는 없고 오직 전진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 자들의 표어가 되어야 한다.

* 교과에 인용된 예언의 신의 증언들은 모두 영문 페이지로 표기됨.

일요일(12월 30일)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과 그 후의 제자들

도입)
예수는 그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 중에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규정을 세웠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따르는 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자세는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려는 태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의 삶의 기본 철학이 되며, 제자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지침이 된다. 제자가 되는 데는 자신에 대한 결단과 결단에 따르는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결단의 의지와 희생을 각오하는 자세는 제자에게 필수적인 태도이다. 그가 자신의 의지와 결심을 행동으로 보여줄 때에만 진정한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보다 나은 가치와 숭고한 사명의 삶의 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보다 고양된 삶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보통의 삶을 넘어가는 자기 조절과 훈련이 필요하다. 누구나 예수에게 오는 자는 그에게만 관심을 갖고 그를 따르는 일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그를 온전히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가족 이상이며, 그는 인생과 만물의 근본이다. 그는 모든 것의 우선이다. 고로 그를 따르는 일은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서 제자도의 개념은 역사적 차원의 제자도와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로 나타난다.
먼저 역사적 차원의 제자도란 크신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첫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나사렛에서 온 랍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친밀하고도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란 그리스도와 회심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세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가리킨다.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는 또한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생애로 인해 직면하게 되는 도전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제자도의 개념에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느냐의 문제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나타내느냐의 문제가 함께 포함된다.
바로 여기서 역사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제자도가 함께 만난다. 오늘날의 제자들은 역사 속에 기록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의 경험을 통해 주어진 영감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 마태복음 4:18-22에 나타난 제자도의 개념을 정리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요구하신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 네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갖게 됩니까? 요한복음 1:40-42을 참조하십시오. 이 구절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2. 사도행전 11:26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제자도의 의미에 관해 어떤 통찰을 갖게 됩니까?
답:

교훈: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좇았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부가적용)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제자로의 부르심에 뒤따르는 모험과 위험성을 제거하려 애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 가운데 선포되지 않고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교회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집단에 불과하다. 그런 교회는 아무 능력도, 도전도, 변화도 없다. 우리가 복음 때문에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확신이 없다면, 복음은 어느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방이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전투함이다!

월요일(12월 31일)
누가 제자인가?

도입)
부모와 아내, 형제들, 자매들 등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름은 긴급함을 알려주고 있다. 그를 따라 나서는 길만이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를 따라 나서는 결단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에 필요하다. 자기 생명을 구하려면 그에게로 나와야 한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이상이며, 그는 인간에게 구원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주님은 이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가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로 사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자들도 주님의 이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자기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이다. 자기 할 일에 대해, 책임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할 일을 위해 충실한 자세로 삶을 감당한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 자기 할 일에 대한 자각 의식을 갖고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건물을 지으려 할 때에 건물을 짓는 비용을 계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건물에 대한 청사진이나 설계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설계에 나온 대로 건물을 짓는데 소용되는 재료나 사람들의 인원 동원 등이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 전에 그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의 견적이나, 계획 등을 세워 필요한 물자나 재정 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에도 자신의 결단과 더불어 그를 위한 자신의 삶을 드리고, 그를 위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희생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한 충분한 계획과 지략과 전략 등이 필요할 것이다. 일에 대한 무슨 정책이 필요한가? 과거에 이루어 놓은 일에는 과거에 필요한 전략이 있듯이, 현재에 진행해 가는 일에는 현재에 필요한 정책의 수단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미래는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나 유동적인 일의 변화의 상태가 지금보다 다르다는 것이다.

제자(disciple)라는 단어는 ‘학습자,’ ‘견습생,’ 또는 ‘신봉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마쎄테스(mathetes)에서 왔다. 즉 한 가지 목적에 마음을 고정시킨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다. 신약 특히 사복음서에서 제자란 대부분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제자는 “어떤 스승이나 운동을 흠모하는 초심자나 추종자로서, 그 스승의 가르침이나 그 운동의 방침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말한다”(폴 J. 아치트마이어 편, 하퍼 성경사전, 1985년, 222). 그러므로 제자는 가르침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스승이나 교사에게 견습을 받는 견습생이나 학습자이다. 스승이 없으면 제자도 없다. 신약에서 제자라는 용어는 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1. 제자도에는 명령에 따르고 헌신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답:

2. 그리스도인들도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로부터 견습을 받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 충성과 헌신을 바쳐야 합니까? 교회입니까? 교리입니까? 가르치기를 잘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설교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고린도전서 1:10-17, 특히 12절의 말씀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빛을 던져줍니까?
답:

교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다른 어떤 것에 분산시키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집중하여야 한다.

부가적용)
주님의 제자의 표시는 그가 주님을 위해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다. 그분을 위해 수고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며, 제자로서 살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이나, 자기 기준의 가치 등을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소금처럼 유용한 인물이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소금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맛을 내는 것과 부패 방지의 역할을 하는데 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소금처럼 제 맛을 낼 줄 아는 사람이며, 그리고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화요일(1월 1일)
어떻게 제자가 되는가?

도입)
기독교는 종교나 철학이 아니고 관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 방식의 핵심은 예수님처럼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15:2-3)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증거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드는 것이 아니고, 문화를 거스르는 것이며, 어려운 것이다. 다행히 우리를 도우시는 손길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전2:12,CEV) 진리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영적인 성장은 거짓을 진리로 대체시키는 과정이다. 예수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만드신다. 성화는 계시를 필요로 한다. 예수님과 닮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그분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7)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말들과는 다르다. 그 말씀은 살아 있다(히4:12, 행7:38, 밷전1:23), 예수님은 “내가 저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세상의 것들이 변한다.
1. 마가복음 1:19-20을 읽으십시오(참조 마 4:18-19). 이 구절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추종자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 줍니까?
답:
신약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제자들은 선택되었다. 즉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스스로 제자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부르심에 반응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2. 다음 구절들은 이 주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막 2:1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막 3:1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5:8-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 9: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사적 상황에서 제자도의 주도권이 제자들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 구절들은 보여준다. 주도권은 주님께 있고, 각 제자들은 주님의 그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조차도 전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 또한 거룩한 주권이 내포되어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 제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은혜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편을 제공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까지 손길을 뻗치셔서 부르심에 응하기를 호소하신다.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누가 의심할 수 있으랴?

3. 이 말씀들을 읽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교훈: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다만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분의 이끄심과 부르심에 감사드리자.

부가적용)
성숙을 위한 지름길은 없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의 개발도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자랄 것인가를 걱정하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강하게 자랄 것인가를 걱정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영생의 관점에서 바라보시고 절대 서두르지 않으신다. 레인 아담스는 이러한 비교를 했다. 그리스도가 전환기를 통해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줌으로써 우리를 약화시켜야 하는 경우가 있다. 첫 노크에 문을 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항하고 방어한다.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교두보를 확보하시는 것이다. 삶 전부를 드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있다. 그리스도가 교두보를 세우신 순간, 그분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정복하실 때까지 영토를 조금씩 늘려가기 시작하신다. 고통과 전쟁이 따르겠지만,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고 약속하셨다. 제자도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결국 우리가 도착하게 될 목적지다. 하나님은 매일 우리가 조금 더 하나님을 닮아가기 바라신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오늘날 우리는 속도에 집착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도보다는 강도와 안정성에 더 관심을 두신다. 진정한 성숙은 그 경험이 아무리 강력하고 감동적이라 하더라도 단 한 번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로 들어오시고 우리가 그를 닮아가면서 점점 밝고 아름다워진다”(고후3:18,Msg)

수요일(1월 2일)
제자도의 조건들

도입)
“교회는 수십 년 다녔지만 믿기 전에 비해 변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성품도 삶도 옛날 그대로입니다. 그러다보니 종종 가정은 지옥같이 느껴지고 교회 생활도 형식적이 되어버린 지 오랩니다. 물론 예수를 자발적으로 증거 해 본 경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만 가면 모범 신자로 대접받다보니 저 자신의 이중성과 위선에 괴로움만 더해갑니다.” 이 말은 어느 그리스도인의 고뇌에 찬 고백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깊은 고뇌 속에 빠지게 될 때, 그 때가 바로 성령의 격려하시는 음성을 듣는 때이다. 또한 새롭게 일어서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고뇌 속에 빠져 무력해지는 이유는 한 마디로 새로운 신분에 맞는 삶에서 너무나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제자로서의 삶보다는 과거의 습관대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감당해야 할 세 가지 사명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이다. 아무리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은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래서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볼 수 없겠다. 둘째, 그리스도의 제자는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 사랑을 받기 보다는 주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 받게 되는 선물인 성령의 열매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사랑 중의 최고의 사랑은 복음으로 이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나서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한다. 이처럼 말씀대로 순종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삶,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이것은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순종할 때 얻게 되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령과 동행하는 자의 삶은 매일 변화가 된다. 가정은 천국이 되고 교회 생활 역시 받는 은혜로 뜨거워진다. 그 뿐인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승리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인 것이다. 이 같은 충성된 제자들을 통해 오늘도 이 죄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소망하시는지 모른다.

지금까지의 공부를 통해 우리는 제자의 몇 가지 조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신약에서 제자도는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도록 사람들을 부르심으로 시작되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반응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제자도의 한 조건이 된다.
둘째, 따르는 자는 자기가 추종하는 대상에 대해 구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 자들은 그분에게서 이전의 다른 이들과는 구별되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들이 주님을 따랐던 것은 그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자도의 세 번째 조건은 앞의 두 가지 조건에 대한 자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즉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과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은 부르심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 나타나야 한다. 적극적인 반응이 없이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자원하는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능동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께서 각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초청하셨을 때 그들은 즉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이 순종했다는 것은 순종이 제자 됨의 한 조건임을 의미한다. 고집스럽게 불순종하는 사람은 결단코 주님의 성공적인 제자가 될 수 없다.
한편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결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일터를 버렸고, 가족을 떠났으며, 가진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유의하였다. 그러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직장과 가족과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요구가 있을 때에 그렇게 자원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은 그분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순종함으로 직접 따라나서야 한다.

목요일(1월 3일)
제자도의 본질

도입)
참된 기독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헌신이다. 구주께서는 저녁의 여가 시간이나 주말이나 은퇴기를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주님께 첫째 자리를 드릴 사람을 찾으신다. "주님께서 이전과 같이 오늘도 찾고 계시는 대상은 친히 앞서 걸으신 자기 부정의 길을 기꺼이 따르려는 자들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솟아 나는 불굴의 충성심을 지닌 사람들이다."(H. A. 에반 홉킨스)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주님의 갈보리 희생에 합당한 보답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린다 할지라도 어찌 그같이 놀랍고, 그같이 신성한 사랑을 다 채울 수 있겠는가!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요구를 하신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사치한 생활을 좇는 시대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간과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기독교를 단지 지옥을 면하거나 하늘나라를 보장하는 것으로만 간주하려 든다. 더욱이 우리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최고의 것을 누릴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경에 제자의 삶에 대한 엄숙한 말씀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말씀들을 우리가 생각하는바 기독교에 관한 사상과 조화시키려고 애쓴다. 우리는 병사들이 애국심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피와 땀과 눈물"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삶에 특징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자신과 관련이 없거나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여긴다.

주님을 따르도록 부르신 데는 공동체와 친교의 삶을 살도록 부르신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분명히 밀접한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제자도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분의 말씀 곧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예수님의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이 긴밀한 관계를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15:9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당신과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로 설명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초청하시면서 우리가 그분께 더 가까이 밀착될 필요가 있음을 더욱 강조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은 제자도에 관해 또 어떤 사실을 말해 줍니까?
마 10:32-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2:37-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4: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마태복음 10:24-25과 누가복음 6:40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구절들은 제자도의 어떤 중요한 핵심을 지적해 줍니까?
답: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자도에는 과거를 청산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일깨워준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있기를 고대하고 그분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하며, 그분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마가복음 3:14에는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면 그분으로부터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닮아 가도록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분의 왕국에 관한 비전을 갖게 되고 그 왕국에 들어가기를 열망하였다.

교훈: 가지가 포도나무에 온전히 붙어 있듯이, 제자는 스승과 함께 거하면서 스승의 인격과 가르침을 통해 배우고 스승을 더욱 닮아가게 된다.

도입)
자기 사랑은 제자도에서 가장 견고한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 있게 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금욕과 다르다. 금욕은 어떤 음식, 쾌락, 집착 등을 금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완전히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나 권위를 일절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자아가 왕좌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 마틴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님, 저로 자신의 뜻을 갖지 않도록 하옵시고, 참된 행복이 외적으로 임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말씀은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거나 복음 전파에 쓰일 수 있는 물질의 소유를 전부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은 무위도식자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 가족과 자신에게 필요한 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삶에 대한 그의 열망은 그리스도의 목적을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님의 일에 투자하며 자기 앞날을 하나님께 맡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 의를 구하면서, 결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있는 때에, 그는 양심상 남은 돈에 집착할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위하여 다시 오실 때, 마귀의 수중에 들어갈 재물을 모으느라고 생애를 낭비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며, 간직할 수 없는 것과 이미 애착을 버린 것들을 드린다.

금요일(1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18-219, 226-227, 303, 442, 576-577, 589-591, 10권, 265-266, 280-282, 500-503, 678-680, 시대의 소망, 139-143, 244-251, 292.

“진리의 이론이나 그분의 제자라는 공언만으로는 어떤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목적의식이 약해지고 갈망이 늘 변하는 것은 전심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실물교훈, 50).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 마태의 마음에는 주저함이나 의심도 없었고 이익이 남는 사업이 가난과 곤란으로 바뀌어지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
이전에 부름을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러하였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시자 즉시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다. 이 제자 중의 어떤 이들에게는 생계를 그들에게 의존하는 친구가 있었으나 구주의 초청을 받았을 때에 머뭇거리거나 내가 어떻게 생활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할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에 순종하였다”(시대의 소망, 27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이 차이점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교회의 교인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2.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악용되거나 오용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다시 말해 사람이 자신의 당연한 책임과 도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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